[인문학강의] '현실'의 소녀가 '허구'의 바다를 바다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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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로욜라와 예수회 (스페인에서 나온 예수회)

로욜라(Loyola)와 예수회(Jesuita)



스페인은 세계에서 인구 대비 가톨릭 신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이탈리아에서 보는 이상으로 규모가 큰 성당들이 자리 잡고 있다.


스페인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 역사, 특히 구교의 역사와 깊은 관련을 맺어 왔음을 알 수 있는데, 나라의 통일에 가톨릭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정치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로욜라, Ignacio de Loyola)


가톨릭인이면 스페인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교도나 반역자로 처형되었던 시기가 있었고, 그 전통으로 가톨릭인으로서의 자부심도 강한 국민이다. 1517년 루터에 의해 불이 지펴진 종교개혁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구교의 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사실 스페인에도 신교인(Protestante,쁘로떼스딴떼)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들의 교회가 있기는 하지만 수가 상대적으로 미미한 편이다. 스페인에서 신교의 불이 지펴진 곳은 남부 까디스(Cadiz)를 중심으로 한 근접 지역이다. 영국에서 불어온 신교 및 신약성경 번역이 이곳에서 처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존 성당에 비한다면 교회 건물은 작은 편이고, 시내 중심보다는 시골의 외진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선교하는 예수회 신부들, Jesuitas)


15세기 로마 교황청을 향한 루터의 반발은 교회의 개혁을 갈망하던 사람들과 교황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던 많은 유럽의 세력가들 사이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독일과 스위스, 네덜란드 등으로 퍼져 나갔다. 그 영향으로 교황의 1인 통치가 사실상 흔들리면서 교회 내부에서나 일반인들 사이에서 혼란이 일었고, 철학과 사상에 있어서도 종교개혁의 여파는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 가장 가톨릭을 옹호하고, 가톨릭 세계의 맹주로서 정력적으로 움직였던 스페인 역시 개혁의 소리를 피할 수 없었다. 스페인 내부에서도 자성과 변화의 의지를 표명하는 일이 여기저기서 생겨났다.


개혁을 원하던 사람은 두 가지 부류였다. 하나는 루터의 길을 따라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는 이들과, 또 하나는 기존의 틀, 즉 교황을 인정하면서 교회의 점진적인 개혁을 이루려는 이들이었다. 스페인의 보수적인 분위기는 후자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개혁 속에 빛나는 한 사람이 빠이스 바스꼬(Pais Vasco) 출신의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 1491~1556)이다.


로욜라는 당시 정복 전쟁(Reconquista)으로 정신이 없었던 스페인에서 태어나 기사로서 전투에 참가한 경력이 있으며, 늦은 나이에 사제 수업을 마치고 교회에 들어가게 된다. 그가 사제로서 길을 걷게 된 시기는 이미 교회의 질서가 심하게 흔들리던 때였고, 그 역시 교회의 문제점을 잘 간파하고 있었다. 로욜라는 파리 대학에서 이후 대표적인 인문주의자로 등극할 에라스무스(Erasmo)와 함께 공부하기도 한다. 스페인에 비해 개방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이 강한 파리가 그의 개혁 정신에 어떤 영향을 주었음 직하다.


로욜라가 늦은 나이에 로마에 입성하여 교황 바오로 3세의 승인을 얻어 설립한 예수회(Jesuita)는 일단 교황을 중심으로 흔들린 교회의 기반을 바로잡고, 그 체제 안에서 개혁을 이끌어 나가고자 했다. 즉 기본적으로는 교황 체제에 전적으로 복종하면서 기존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후 예수회는 교황의 비호를 받으며,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군대로서 세계를 누비게 된다.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꼬 하비에르, Francisco Javier)


예수회의 첫 선교사로 유명한 프란시스꼬 하비에르(Francisco Javier, 1506~1552)는 일본에까지 와서 선교 활동을 했으며, 임진왜란 때 왜군을 따라 한국 땅을 밟은 그레고리오 데 세스뻬데스(Gregorio de Cespedes, 1550~1611) 역시 스페인의 예수회 신부였다. 예수회 신부들은 종교개혁파에 의해 점유된 지역을 다시 회복하였고, 특히 신대륙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데, 교육을 통해 교세를 확장하고 사람들을 깨우치는 일을 도맡았다. 중남미 대륙의 초기 대학들은 예수회가 설립한 것이고, 한국의 서강대학교 역시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대학의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스페인을 휩쓸던 바로크 문화와 문학 및 역사가 세계적으로 퍼질 수 있게 된 것도 예수회의 공헌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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