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가 주변과 부딪치는 이유의 근본으로 내려가면, 바로 '절대성의 강요'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 예의 핵심이 '둘씨네아'(Dulcinea)인데, 그 만이 정한 이 여인에 대한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다른 상대에게 무조건 수용하라고 하니, 상대가 '보지도 않았고,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 대해 받아드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돈키호테는 둘씨네아를 성모 마리아의 수준으로 올려놓았는데, 반기독교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큼, 기사로서 성모의 자리에 둘씨네아를 올려놓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Aparición de Dulcinea, Apparition de Dulcinea, 둘씨네아의 현현) 그렇다면 이렇게 시대착오적인 돈키호테는 또 다른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기독교의 세상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절대성'(Absolutismo)을 가지면서, 무조건적으로 믿고 따르는 존재였고, 그 누구도 '반기'(Rebeldia)를 들 수 없었지만, 이미 변화된 사회, 즉 돈키호테가 발로 밟고있는 사회에서는, 그 절대성이 상실된, '상대성'(Relativismo)의 시대에 사람들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작품 중에, "라 만차의 위대한 여인, 또보소의 둘씨네아와 비교될 만한 여인이 이 세상에는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하고, "그녀를 보지 않고도, 믿고, 고백하고, 확신하고, 맹세하고, 그녀를 보호하는 것이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즉, 둘씨네아에게 성모 마리아의 절대성을 부여하여 사람들에게 강요하지만, 그것을 수용할 사람은 없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여인이 있고, 보고 만져야 만이 인정하고 믿는 시대에 와있다는 점이다. 실질적으로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통해, 이런 것 저런 것을 다발적으로 다루고 있다. 즉, 기사의 잘못 된 점을 비판하는가 하면, 동시에 시대착오적 기사를 통해, 자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