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위작 이태리 방문을 마치고, 다시 스페인 땅을 밟은 일행은 지중해 항해의 출발지였던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거기서는 갔던 길의 역순으로 도시들을 거쳤으며, 마드리드에 도착해서는 다시 수도원에 머물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몬세랏 산을 통과하지 않았는데, 갈 때보다는 일정을 단순하게 하여, 속도를 내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갈 길도 멀지만, 빈손으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는 심적 부담이, 이들의 발길을 재촉했다. 바티칸에서 교황을 알현하고, 일본 내의 기독교 탄압과 그에 대한 교황청의 적극적인 대책을 요청했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답은 받지 못 했다. 오히려, 스페인 왕에게 그 지원 여부를 물어보라는 정도의 답을 받았을 뿐이었으니, 멀고 긴 거리를 온 사람들에게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스페인 왕의 입김은 교황청에 강하게 미쳤다. 그렇기에 교황은 스페인 왕의 눈치를 보는 것도 있었다. 그렇다고 교황이 주저하는 것을, 스페인 왕이라고 선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결정할 입장도 아니었다. 게다가 펠리뻬 2세의 집권기에는 스페인 왕이 내리는 결정은매우 절대적인 힘을 가져서, 교황청에서도 스페인 왕실이 내린 사항에대해서는 그대로 따랐지만, 그의 아들 펠리뻬 3세 시대에는, 오히려 교황과 스페인 왕과의 관계가 그리 매끄럽지 못했다. 권력이 이동하는 전환기에 서로 조심하고, 견제하는 정도였다. 마드리드에 도착하면서, 루이스 신부는 왕실과 접촉하고, 로마 방문의 결과와 함께 스페인 왕의 지원 및 멕시코와 필리핀 간의 은 교역 독점권을 없애고, 일본이 그 무역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을 다시 한 번 더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왕실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했다는 사실을루이스 신부와 쓰네나가는 감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절단이 떠난 후, 일본 내 급변하게 진행되고 있는 권력 이동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스페인 왕실의 여력도 매우 약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석희씨, 건물 밖에 호세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찾아온 사람이 호세라는 소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