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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강의] 정신분석학적으로 본 돈키호테, 햄릿, 그리고 파우스트 -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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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20세기를 선도한 바르셀로나 예술: 후안 미로(Juan Miró),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 그리고 후안 그리스(Juan G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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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까소는 그의 주 활동 무대가 파리였기 때문에 프랑스인으로 오인되기도 하지만, 호안 미로(Joan Miro, Juan Miro, 1893~1983)는 바르셀로나 출신으로 ‘진짜배기’ 스페인 사람이다. 그는 당시 스페인에서도 프랑스의 바람이 가장 거세게 불던 바르셀로나에서 미술을 시작한다. 초현실주의라고 불리는 바람은 미로를 독특한 기법의 소유자로 만들었고, 가우디의 독특한 건축은 그의 초현실주의적인 감수성을 더욱 자극하였다. 스페인의 전통과 가장 현대적인 기법이 호안 미로에 의해 혼합되고 완성된다. (El Carnaval del Arlequin, Joan Miro) 호안 미로는 자연의 개념을 상징하는 기호들을 일정한 틀로 만들어 작품에 구현하고 있어서, 그의 그림에서는 추상성과 함께 또 다른 의미의 통일과 균형을 보게 된다. 그의 미술은 달리나 피까소의 미술과 거의 유사한 관점에서 시작되고 있으나 표현에 있어서는 상이하며, 특히 자연, 바르셀로나의 풍경과 바다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한편, 미로의 그림에는 움직임에 더불어 기하학적인 균형 감각이 잘 드러나 있기도 하다. 마치 조각과도 같은 비례와 대칭이 두드러지며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그림보다는 건축이나 구조물에 연결할 수 있는 것이어서, 가우디를 생각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미로는 파리에 가서 조이스나 헤밍웨이 및 피까소 등과 만났으며, 그것이 그를 모더니즘계, 아방가르드 작가의 계열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의 그림은 직선보다는 곡선과 직선의 교묘한 조화가 특징적이며, 이미지의 상징성이 강하다. 원색을 많이 쓰고 있는데, 그가 주로 그린 대상은 여인이며 거기에 하늘과 인간 세상의 중개자로 새를 많이 그리고 있다. 호안 미로의 그림에서 별은 하늘나라와 상상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반프랑꼬주의자였으며, 1970년대 초에는 바르셀로나에 호안 미로 재단을 설립해 작품을 전시하였다. (Obras de Joan Miro) 호안 미로는 피까소, 달리와 더불어 현대 바르셀

[문예] 20세기를 선도한 바르셀로나 예술: 피카소(Pablo Picass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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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색 시대 다음으로 피까소는 유랑 극단에 관심을 가진다. 광대 혹은 원숭이 같은 동물의 모습에서 먹고살기 위해 사회라는 곳에 편입하여 떠돌 수밖에 없는 고단한 삶을 포착하였으며, 이는 프랑스 생활에 대한 그의 심경을 대변한다. 물론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유랑 극단이라는 소재이지만, 그중에서도 한곳에 머물지 못하는 떠돌이 신세가 작가 스스로의 삶과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공중에서 묘기를 부리는 소녀」, 「광대」, 「곡예사 가족」 등이 이 주제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그림을 이루는 주 색깔이 청색에서 장미색으로 변모하고 있으니, 바로 ‘장미의 시기’이다. 이 무렵, 피까소는 자신의 중요한 미술적 전환을 알리는 「아비뇽의 여인들」(1907)을 발표하는데, 여기서는 엘 그레꼬의 그림 양식과 당시 아프리카에 가지고 있던 관심이 가미되어, 여인이 아프리카의 가면을 쓰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피까소의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은 고갱이 그랬던 것처럼 그즈음의 유럽이 당면한 복잡하고 잔인한 인간 사회에 대한 거부반응이었으며, 좀 더 단순하고 원시적인 것을 향한 갈구에서 비롯되었다. 「아비뇽의 여인들」은 그의 친구 막스 자코브가 바르셀로나 사창가의 이름을 붙여 줌에 따라 제목이 결정된 것이다. 즉, 그림 속의 여인들은 매춘부이다. 이어 피까소는 프랑스에 있는 동안 세잔의 그림에 영향을 받는 등, 스페인 전통과 아프리카 미술 및 색의 새로운 발견이 어우러져 그만의 독특한 그림을 만들어 낸다. (Les Demoiselles d'Avignon ) 1915년 피까소가 사랑하는 에바가 죽었고, 같은 해에 내놓은 「익살 광대」는 그 슬픔을 내포하고 있다. 그의 입체주의는 꿈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듯한 초현실주의 경향과 잘 어울릴 수 있었다. 즉 사물의 입체적인 시각은 마치 상상에 의한, 사물의 다른 면을 보려는 시각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전통적 기법에 대한 부인은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가 피까소에 와서 결합한 이유이다. 그의

[문예] 20세기를 선도한 바르셀로나 예술: 피카소(Pablo Picass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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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하면 생각나는 또 다른 주요 인물로는 피까소(1881~1973)가 있다. 미래에 스페인은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까소가 될 화가가 스페인 남부 해안가 말라가(Malaga)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서 바르셀로나에 정착한 것은 1895년의 일이다. 피까소는 스페인에서도 가장 진보적이며 파리에 가까운 이 현대적인 도시에 도착함으로써 자신의 창작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피까소가 파리에 발을 디딘 것은 1901년이었으며, 1904년에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창작 생활을 한 것이 바로 ‘청색 시대’(Epoca Azul)라고 일컬어지는 시기이다. 파리에서 돌아온 그의 눈에 비친 바르셀로나는 파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난했으며, 스페인에 대한 생각이 감상에서 현실로 돌아옴에 따라 그림 속에 노동자와 하층민의 생활이 등장하면서, 청색 시대의 작품은 작가의 암울한 현실 인식을 나타내게 된다. 피까소는 이어 1904년에 프랑스에 간 다음 그곳에 완전히 정착하여, 거의 모든 생을 프랑스에서 보내면서 창작을 했다.                                                 (Las Obras de la Epoca Azul de Picasso) 그가 스페인에 잠깐씩 들어왔던 것은 방문 형식이었고, 그 배경에는 프랑꼬(Franco)의 독재정치에 저항하려는 의도도 들어 있기는 했으나, 스페인의 창작 조건이 그의 화가 생활에 도움을 주었던 것도 한 이유였다. 피까소는 살아생전에 대단한 성공을 거둔 몇 안되는 작가 중의 하나이다. 그가 그린 그림은 그대로 전시되어 경매에 붙여지고 막대한 액수로 판매되었으니, 돈과 명예에서 남보다 뒤지지 않았다. 애정 행각도 대단했으며 천수를 누리는 복도 얻었으니, 금세기 보기 드문 예술가라고 칭할 수 있겠다. 1962년에는 하이메 사바르떼스란 사람이 제안하여 피까소 미술관이 바르셀로나에 만들어져, 세계적으로 흩어져 있던 많은 작품이 다시 스페인에 모이는 계기가 되었다. 피까소는 말라가 태생으로 라 꼬루냐(La Cor

[문예] 20세기를 선도한 바르셀로나 예술(1): 가우디(Anonio Gau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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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가 보수적이고, 그 배경에 스페인의 16~17세기를 지칭하는 황금세기(Siglo de Oro)와 20세기 이전의 고전적 전통이 있다면, 스페인 제2의 도시 바르셀로나는 20세기의 도시라고 말할 수 있다. 항구도시이며 외부와의 교류가 많았던 바르셀로나는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도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준 사람들 중에는 위대한 건축가와 화가가 많다. 마드리드가 쁘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을 중심으로 엘 그레꼬(El Greco), 루벤스(Rubens), 벨라스께스(Velazquez), 고야(Goya)가 있어 풍요롭듯이, 안또니 가우디(Antonio Gaudi)와 빠블로 피까소(Pablo Picasso),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호안 미로(조안 미로, Joan Miro) 등의 인물은 바르셀로나를 가장 현대적이고 세계적인 도시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Museo de Picasso, Barcelona) 살바도르 달리 등의 여러 작품들이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Reina Sofia) 현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긴 하지만, 이들 작가의 작품에 들어 있는 배경은 바르셀로나였으며, 바르셀로나에도 그들의 작품이 많이 보관되어 있다. 물론 가우디의 작품은 시내 이곳저곳에 웅장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어서, 마치 시내 전체가 그의 작품인 양 느끼게 한다. (Museo de Joan Miro, Barcelona) 가우디(Gaudi, 1852~1926)가 없는 바르셀로나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그는 이 도시와 스페인을, 그리고 스페인 예술과 건축의 전통을 세계에 알린 제1의 공신이다. 특히 가우디가 만들었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는 ‘성가족 성당’(La Sagrada Familia)은 바르셀로나에 대한 포스터 가운데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도시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안또니 가우디의 건축양식은 고딕에 이슬람 양식이 곁들여지며, 거기에 작가의 창조 정신이 가미된다. 보통 가우디를 르네상스 양식과 로마네스크,

[문예] 예술로 빚은 도시, 바르셀로나(Barcelona)(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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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경기도가 둘러싸고 있고 마드리드를 꼬무니닷 데 마드리드가 포함하고 있듯이, 바르셀로나는 까딸루냐의 중심지이며 다른 대도시들이 그렇듯, 이 스페인 제2의 도시는 까딸루냐 지역과 분리되어 있기도 하다. 따라서 까딸루냐는 바르셀로나를 기반으로 출발했지만 행정구역상 바르셀로나를 제외한 인근 지역을 말한다. 까딸루냐는 산업이 발달하였고 인구도 많은 편이나, 역시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보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까딸루냐는 스페인 산업의 중요 부분을 차지하며, 긴 해안은 ‘헤로나’(Gerona, 까딸란으로는 ‘지로나’)를 중심으로 하는 북쪽의 ‘꼬스따 브라바’(Costa Brava, 거센 해안)와 ‘따라고나’(Tarragona)를 중심으로 하는 남쪽의 ‘꼬스따 도라다’(Costa Dorada, 금빛 해안)로 나뉘어 해안선을 따라 발전한 휴양지가 각광 받고 있다. (로마유적, Ruinas Romanas, Tarragona) 주요 도시로는 헤로나와 ‘레이다’(Lleida)가 있으며, 따라고나는 로마 시대 까딸루냐 지역 최대의 도시였다.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원형극장과 연극장 등 여러 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로마 시대의 건축물에 아직도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이곳은 시간이 멈춰진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따라고나는 철저한 도시계획에 따라 형성되었기 때문에, 로마 문화를 한눈에 엿볼 수 있다. 특히 4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뽄뜨 델 디아블레’(Pont del Diable, 악마의 다리)라고 하는 다리는 세고비아의 로마 수로와 유사한 모습을 가지며, 기원전 200년경에 지어져 2,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 (악마의 다리, Pont del Diable, Tarragona) 이 밖에도 까딸루냐에는 고급문화 휴양지이며 별장촌이 많은 ‘시체스’와 살바도르 달리가 살았던 ‘피게레스’ 등이 있다.  #바르셀로나 #까딸루냐 #스페인여행 #스페인어 #스페인 #스페인역사 #스페인음식 #콜럼버스 #독립운동 #마드리드 #스페인와인

[문예] 예술로 빚은 도시, 바르셀로나(Barcelon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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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해상권을 지중해 주요 도시들과 나누면서 성장한 바르셀로나는 유럽의 다른 나라, 여러 도시와 견줄 만한 스페인의 대표적인 도시라고 할 수 있다. 히브랄따르와 말라가, 세비야가 아프리카, 아메리카 땅에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면, 바르셀로나는 유럽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바르셀로나는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의 북부에 직접 닿아 있다. 이곳의 공업과 상업은 스페인에서 가장 큰 규모의 노동자 그룹을 만들어 냈으며, 20세기 초 스페인에서 가장 먼저 노동자 문제와 파업이 발생했던 지역으로 유명하다. (Ramblas) 파리에서 샹젤리제를 걷는다면 바르셀로나에서는 ‘라스 람블라스(Rambras) 거리’를 걷게 될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가장 생동감 있고 가장 현대적인 면모를 보여 주는 라스 람블라스 거리는 ‘쁠라사 데 까딸루냐’(Plaza de Cataluna, 까딸루냐 광장)에서부터 ‘쁠라사 뽀르딸 데 라 빠스’(Plaza Portal de la Paz, 평화의 문 광장)에 이르는 거리를 말한다. 고급 의류를 비롯하여 다양한 물건을 접할 수 있을 뿐더러, 인도를 따라 즐비한 임시 가판대에서는 책은 물론이고 지역의 여러 공예품과 꽃들을 구입할 수 있다. 특히 4월에 장미 시장이 열리면 거리에는 꽃이 넘쳐흐른다. 라스 람블라스는 문화의 거리이기도 하다. 수많은 영화관을 비롯하여 연극장들이 있으며, 그중에서도 ‘그란 떼아뜨레 델 리세우’(Gran Teatre del Liceu)는 전 유럽을 통틀어 가장 전통 있고 명성 있는 극장으로 손꼽힌다. (Ramblas) 라스 람블라스에 이어 바르셀로나에서는 ‘몬주익 성’이 유명하다. 1929년 세계엑스포를 개최한 자리로, 몬주익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17세기에 세워진 몬주익 성은 시내와 항구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며, 화려하고 성 앞의 분수가 아름답다. (Ramblas de Barcelona) 바르셀로나의 ‘몬세랏 산’을 찾는다면 가우디의 예술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가우디의 양식이 인공적이지만 또한 자연

[문예] 예술로 빚은 도시, 바르셀로나(Barcelona)(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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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역사적으로 오래전부터 중앙정부와 적대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을 보면, 그들로부터 분리되려는 까딸루냐 자치주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으며, 따라서 새로운 왕이나 독재자가 나타날 때마다 이에 반대하고, 20세기 초에는 무정부주의자들이 많았다. 사실 까딸루냐 지역은 까스띠야 왕국이 통일을 하는 동안 저항했으며, 그들의 영향권 밖에 있었을 때 융성했던 역사를 갖고 있다. (20세기 초 바르셀로나 거리의 노동자 연맹, Confederacion Nacional del Trabajo, Anarquistas en Barcelona) 까딸루냐는 예술 면에서도 중앙의 마드리드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는데, 중세극이 교회에 의해 금지되었다가 다시 허가되는 과정에서 다른 유럽 지역과 동시에 까딸루냐에서도 개방되어 그 현상이 까딸루냐로부터 남쪽에 위치한 무르시아(Murcia)까지 확대되었으나, 까딸루냐 이외의 지역, 특히 마드리드 주변에서는 여전히 중세극이 금지되는 보수성과 중세성을 보였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높은 종탑과 정문의 아치 모양은 바로 이들 인접 지역에서 건너온 유산이다. 당시 가장 선진적인 그림을 그렸던 빠블로 피까소(Pablo Picasso)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호안 미로(Juan Miro) 등의 작가가 이곳을 본거지로 활동한 것을 봐도 이해되는 말이다. 까딸루냐인의 언어인 까딸란도 스페인 공식어인 까스떼야노와는 다르다. 까딸루냐 지방이 아랍인들의 지배하에서 샤를마뉴 대제에 의해 회복되었던 역사, 그리고 12세기에야 스페인의 도시로 편입되어 나름의 독립된 국가 체제를 유지해 왔던 역사가 보여 주듯, 까딸란은 프랑스어와 까스떼야노의 중간에서 프랑스어에 가깝다. 그래서 까딸루냐 지역에서는 프랑스어가 통한다. 그뿐만 아니라 까딸루냐 사람은 프랑스어를 더 선호한다. 학교에서는 공식어인 까스떼야노 대신 까딸란을 따로 지정하여 가르치며, 수업도 까딸란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영화가 한 편 들어오면 까스떼야노로 번역되고 다

[문예] 예술로 빚은 도시, 바르셀로나(Barcelon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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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셀로나인 또는 까딸란과 다른 지역 사람들, 특히 안달루시아(Andalucia) 사람들 간의 비교는 춤으로 설명될 수 있다. 까딸루냐의 춤 ‘사르다나’(Sardana)와 안달루시아의 춤 ‘플라멩꼬’(Flamenco)의 비교가 대표적인데, 단체가 큰 광장에서 손을 잡고 추는 것이 사르다나라면, 개성이 중시되는 춤이 플라멩꼬이다. 사르다나를 추는 사람에게 정말 잘 맞춰 조화 있게 춘다는 말을 하면 기뻐하겠지만, 플라멩꼬를 추는 사람에게 다른 이와 똑같이 잘 맞춰 춘다는 칭찬을 하면 듣는 사람은 오히려 얼굴을 붉힐지도 모른다. 사르다나는 굳이 의상이 필요하지 않고 형식에 구애되지 않아 자유로운 편이다. 성당에 가는 복장이어도 좋고 집에서 일하는 차림이어도 좋다. 나팔 위주의 꼬블라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 역시 단순하고 조용하며 노래를 부르지는 않는다. 반면에 플라멩꼬는 화려한 옷차림에 붉은색이 특징이다. 플라멩꼬는 요란하고 빠른 박자에 구성진 노래가 따라붙고 기타 소리가 빠르다. 중간중간 기분에 따라 “올레!”(Ole), “비바!”(Vida), “벵가!(Venga)” 등의 추임새를 넣어 줄 수 있다. 안달루시아 사람은 말이 많고 금세 친해질 수 있지만, 그 친분의 지속 시간은 짧다고 한다. 돌아서면 잊히는, 그래서 열정적이고 낭만적일 수는 있으나 순간적이며 믿음이 덜 가는 반면에 까딸루냐 지역 사람들은 과묵하고 행동으로 보여 준다고 평가한다. (Muneira) (Zorcico) 흔히 반도의 중앙 라 만차(La Mancha) 지역을 기준으로 지역적 기질을 나누곤 하는데, 라 만차 지역의 북쪽은 통일과 조화를 중시하여 단체 춤이 발전했고, 갈리시아(Galicia)의 춤 ‘무녜이라’(Muneira)와 까딸루냐의 ‘사르다나’, 그리고 바스꼬의 ‘소르시꼬’(Zorcico)가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고 말한다. 물론 교회의 합창도 라 만차 이북 지역의 정서에 맞는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스페인에서 예술을 배우려면 라 만차의 남쪽으로, 과학과 학문 및 사업을 하려면 북쪽으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