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강의] '등장인물'인가, '작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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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Q] ‘돈키호테‘, 세르반테스의 자화상 ('돈키호테 들여다보기'(DQ)에 들어가며)

‘돈키호테‘, 세르반테스의 자화상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가 자신의 삶을 반추해보는 ‘거울보기’라고 할 수 있겠다. 50대 후반, 그리고 60대 후반,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면서, 지나온 삶을 정리해보는 그런 것이다. 거기에 ‘기사’라는 특정한 인물은 나체로 거울 앞에 선 자신에게 입혀야 할 옷이었으니, 그 타이틀과 복장에서는 자신 만의 논리, 즉 ‘기사로서’ 자신을 규정해놓은 어떤 ‘특별한 자신’과 그런 ‘자신 만의 세계관’, 그리고 ‘삶과 생존 가치’ 속에서 겪어야 했던 자신과 자신의 밖의 세계, 즉 모든 타자들과의 대결을 돈키호테라는 인물의 생각과 행동을 통해 그려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의 이런 가치들과 행동이 일반의 사람들과는 너무나 차이가 나는 것이고, 그 가치에 대한 실행의지 역시, 보통 사람의 것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강하게 표출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강렬한 인물이 존재할 때, 당연히 주변에는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되어, 주변의 모든 것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에 따라 대결 구도가 생기고, 대결의 상대가 나타나게 되고, 결투가 있게 되며, 그것을 ‘모험’이라고 한다.

 동시에 아주 그와 가까이 존재하는 사람들, 특히 가족들의 반응은, 그를 붙잡고 현실에 내려오기 만을 바라는 행동으로 점철된다. 돈키호테와 동반한 산초가 그렇고, 그의 집을 지키는 조카가 그러하며, 신부와 이발사, 그리고 그 지역에서는 공부를 했다는 학사 산손 까라스꼬(Sansón Carrasco)가 그 역할을 한다. 보통의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모든 것이 ‘광기’로 해석되니,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큰 짐’이 아닐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타오른 자에게는, 그것이 그의 ‘생존방식’이다. 그렇지 않으면 못 견딜 ‘운명’을 타고난 사람 말이다. 아니, 그에게 그것을 중단하는 것 자체가, ‘죽으라’는 말과 다름이 없다. 세상에 어떤 생명이, 칼과 창으로 죽음을 주지 않는 한, 말로써 그 생존방식을 바꿀 수가 있겠는가? 주변인들의 갖가지 대응 방법, 즉 그에게 이성을 찾도록 하는 시도들은 무의로 끝나고, 오히려 그의 ‘광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역효과 만을 낳는다.

열정이 좋아서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 같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는 ‘팔자’를 타고난 것이라고 볼 때, 그의 생각과 행동은 ‘자기 보호’, ‘자기 생존’을 위한 것이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위험해보이고, 안타깝지만, 그에게는 존재하는 한 멈출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산손 까라스꼬의 여러 시도는 돈키호테를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으니, 최종 아라곤(Aragon)과 까딸루냐(Cataluna)로의 편력에서 마지막 결투를 신청하고, 그 결투에서 지고 만 돈키호테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결국 삶을 마감하는 일 밖에 없었다. 그는 결투에서 지고, 약속대로 돌아온 후, 병석에 누웠으며 생을 마감한다. 어쩌면 기사로 살다가 기사로 죽는, 최고의 기사다.

한편, 아주 의미심장한 것은, 작가 세르반테스의 생(삶)도, [돈키호테] 2권의 마지막 부분에 돈키호테가 세상을 떠나는, 그런 모습대로 작품을 마감하고, 이듬 해에 마감되었다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그려낸 것이며, 마치 ‘에밀레 종’에 내려오는 이야기처럼, 작품과 자신을 섞어 하나로 우려낸 것이 ‘돈키호테’라고 감히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돈키호테에게는 결정적인 결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기사라는 것은  당시에 존재하지도 않은 존재였으니, 시대에 맞지 않은 인물이다. 

바뀐 시대에, 이런 유형의 인물이 주변에 주는 인상은, ‘극단적 이기주의자’가 될 것이고, ‘외통수’가 될 것이다. 따라서 시대착오전 인물의 상황 판단에 사람들은 극도의 불안감을 보일 수 밖에 없으니, 그를 따를 자가 있을 수 없다. 그가 제시하는 아무리 멋진 계획이라도 사람들은 허황된 것으로 볼 것이며, 그 모험에 돈과 자신의 운명을 걸을 자가 없을 것이다. 

유일하게 ‘산초’가 그를 따를 뿐이다.

그래서 ‘돈키호테’와 ‘산초’는 운명적으로 한 몸이다. 아이러니컬하게 세상은 그렇게 조합되고 만다. 가장 현실주의자가 가장 이상주의자와 만나는 것 말이다. 다시 말하면, 돈키호테의 모험은 산초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돈키호테에 대한 산초의 ‘현실 인식’ 노력이, 오히려 돈키호테의 ‘시대착오적’ 행동에 ‘기름’이 된 것이다. 참으로 세상의 묘한 구도다.

한편, 여기서 표현되는 ‘결정적인 결점’조차,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던 자신 만의 세계’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고, 동시에 ‘시대착오적’이라는 말도, 이에 덧붙여 ‘지난 시대의 것을 현실에서 행하는, 그래서 남과 다른’ 것이라고 좋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 작품의 명성 만을 기준으로 간략하게 설명하려 하는 사람들이 주로 내는 결론들이다. ‘불굴의 의지와 열정으로 도전하는 인간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긍정적으로 설명한다.

주변의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자기 자신의 삶을 정당화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럴 수 밖에 없는 운명으로 타고났기 때문이며, 객관적으로 볼 때는 불행한 삶을 살아온 세르반테스이지만, 한편으로 돈키호테를 통해 반추해보는 자신은, 또 다른 형태의 해석을 낳을 수 있다고 본다. 즉, 세르반테스 스스로도 자신의 삶에 대해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럴 수 밖에 없었고, 또 불행했지만 스스로도 어쩔 수 없이, 그래도 '괜찮게 살았다’는 평가를 내려, 자신 만의 위안을 찾는 경우이니, 통상의 '자서전'이 그렇다.

그 누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후회와 부정적인 것 만을 말하겠는가? 반성할 일도 있고, 나름 좋았다는 생각도 분명히 섞여 있을 수 밖에 없다. 아니, 모든 사람들의 경우처럼, 어쩌면 ‘난 잘 살았어’라고, ‘자서전’을 마무리하고 싶고, 생의 모든 모험과 역경, 환희와 불행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혼이 천국으로 갈 수 있도록 신에게 ‘간구’하는 것으로 마무리 할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기사 돈키호테’를 통해, 자신의 삶을 정리해봤고, 그 설명 방식이 너무나 인간적이고, 모든 이가 동감할 수 있는 것이기에, 또한 자신을 온전히 작품 속에 넣으면서, 동시에 이상한 것, 또는 엉뚱한 것이 자아내는 즐거움과 삶의 교훈들이 공존하는 작품이기에, 계속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돈키호테가 세르반테스의 자화상이라고 볼 때, 그는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갔고, 유일하게 ‘돈키호테’를 자신의 허물처럼 벗어 남겼다. 그는 그의 일상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였고, 기록될 것이라 의식하면서, 결정하고 행동했다. 그 결과물이 [돈키호테]로 남았다. 

같은 인간으로서, 그리고 독자로서, 어디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난 누구이며, 어떤 돈키호테이기를 선택할 것인가?

여기, 그의 이야기를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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