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강의] '등장인물'인가, '작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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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과 기고문] 깔데론의 Persona desnuda적 인물 구현과 극중극(II)

 깔데론의 Persona desnuda적 인물 구현과 극중극

 (『La vida es sueño』를 중심으로)


                                                                                                                                              윤 준 식


I. 들어가는 말


   스페인문학에서 세르반떼스 만큼이나 많이 언급되고 연구되는 작가를 찾으라면 바로 깔데론을 꼽을 수 있겠다. 세르반떼스와 영국의 셰익스피어가 동시대 양국의 대표작가라는 점과 기타 몇 가지 유사성에 의해 서로 비교 언급되고 있지만, 깔데론과 셰익스피어는 양자가 극작가라는 공통점 외에도 세계연극사에 중요한 한 획을 그었다는 점에서 상호 비교되며, 여기서 괴테가 말했던, “셰익스피어가 포도송이라면, 깔데론은 포도즙이다.”(Shakespeare era el racimo de uvas, y Calderón el zumo)라는 표현은 깔데론의 작품세계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는 점을 지적해주는 예가 될 것이다. 영국의 작가에게 ‘세상은 연극’(Theatrum mundi: El mundo es un escenario)이라는 단어가 따라 다닌다면, 깔데론에게는 ‘인생은 꿈’(La vida es sueño)이란 표현이 언급되며, 이것은 삶의 정의이자, 그것을 반영한 연극의 형이상학적 결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사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연구는 세계적으로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지만, 깔데론은 거기에 비한다면 미약한 편이며, 한국에서는 ‘전혀’라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작품 번역은 물론, 지속적이고 구체적인 연구가 되어있지 못한 실정이다. 세계적으로 깔데론에 대한 접근 방법은 지금까지 수 없이 제시되어 왔다. 그 중에서 바로꼬와 예수회 등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해석 등 일반적으로 드러나는 테마를 통해 연구된 것이 많으며, 천문학이나 연금술적 이해를 바탕으로 확장해본 연구들은 비교적 최근의 경향이다. 한편, 깔데론의 작품에서 극중극의 형태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어서, 이 기법에 대해 상당한 깊이의 연구가 진행되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바로꼬의 철학과 문학을 비롯하여, 음악, 미술 등 예술의 거의가 이러한 ‘작품 속의 작품’(Obra en la obra) 기법을 통해 설명되고 있는 실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중극이 깔데론의 작품에서 어떤 형태로 발휘되고 있으며, 그것은 작품 안 뿐만 아니라, 작품 밖의 현실공간에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작용하는 지를 총체적으로 연구된 경우는 없었다. 본 연구는 깔데론이 구현하고자하는 인간의 실체, 또는 본질을 작중에 표현된 Persona desnuda이라고 정해놓고, 그것이 극중극이란 형식을 통해 어떻게, 그리고 어떤 형태로 구현되는 지를 분석해 볼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연구 대상 작품을 가장 깔데론적이고 가장 바로꼬적이라 생각되는 그의 대표작 『인생은 꿈』으로 정했으며, 이 연구를 통해 깔데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간형, 또는 세계관을 보다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과, 이 때, 극중극이란 기법이 작품 속에 어떤 식으로 기능하는 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II. 『인생은 꿈』의 극중극들


   ‘작품 속의 작품’이란 바로꼬시대의 대표적인 기법이며, 이것이 만들어내는 이중구조는 연극을 비롯하여, 소설, 미술 등 다양한 영역에 널리 사용되고 있음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편, 스페인 바로꼬의 대표 작가인 깔데론은 이 기법을 통해 자신이 구현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인물유형을 『인생은 꿈』에서 정교하게 만들어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다음 장에서 다룰 Persona desnuda의 인물형에 대한 구조적 기반으로, 어떤 극들이 작품 속에 삽입되어 있고, 그들이 어떤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는가를 알아보기로 하겠다. 먼저, 이 작품에서 가장 대립되는 인물은 바실리오(Basilio)와 세히스문도(Segismundo)이며, 우리의 목표대로 극간의 대립을 연구하려 한다면, 우선적으로 이들 두 인물이 형성하는 극들을 살필 필요가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작품을 아무리 자세히 봐도, 세히스문도의 극을 찾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궁궐을 무대로 바실리오가 설정한 상황에서 세히스문도가 왕자로서 역할을 할 뿐, 왕자 자신이 만든 독립된 극은 찾기 어렵다는 말이다. 결국 작품을 통틀어 바실리오의 극이 극중극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한다고 봐야할 것인데, 우리는 그 동안 다른 비평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또 하나의 바실리오극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공간은 작품이 시작하는 순간부터 만들어졌으므로 우리가 인식하기 어렵지만, 분명 내부극을 포함하는 광범위의 공간임은 분명하다. 작품의 중간에 펼쳐지는 궁궐의 극 뿐 만 아니라, 이미 그가 갓난 세히스문도를 감옥 탑에 가둬놓고, 마치 죄인이나 짐승인 것처럼 다루게 한 그 상황이 이 공간에 해당된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세히스문도가 감옥 탑에 갇힌 사실은 별자리가 말해준 운명과 미래의 불운을 피하려는 왕 바실리오의 의도에 따라 만들어진 극이며, 나중에 과연 별자리의 운명에 대한 예정이 정확했는지를 확인해보기 위해 왕궁으로 세히스문도를 불러, 또 다른 극을 만든 것은, 그가 만든 두 번째 극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작품의 총지휘는 바실리오의 몫이며, 세히스문도는 제1극에서도 등장인물이며, 제2극에서도 등장인물이다. 한편, 끌로딸도는 왕의 명을 받아 극과 극, 극과 현실을 오가는 자유로운 인물이며 연출가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극간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단순화될 수 있다.


 

  이런 의미라면, 세히스문도는 태어나면서 한 번도 자신의 극공간을 가진 적이 없으며, 그가 궁궐의 극에서 깨어나 삶과 꿈을 이야기하는 상황도 바실리오의 제1차 극 범위 안에서 이뤄진다. 결국, 작품의 말미에서나 국민들이 세히스문도의 감옥 탑에 나타나 그를 구출하고 왕으로 추대하는 장면에 이르러, 세히스문도가 제1차 바실리오의 극(외부극)을 부수고, 바실리오와 동일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이전의 세히스문도가 바실리오의 극 안에 존재하면서, 인형 조종자에 의해 조정되었던 인형과 같은 존재였다면, 이제는 인형조종자와 동일한 차원에서는 독립된 존재로 발전한 것이다. 자신을 둘러 싼 극 공간을 깨고 자신이 주인이 되는 공간을 차지하게 되면서 독립된 자유와 의지의 단계에 접어든다. 

   한편, 위의 그림에서처럼 제3의 극으로 로사우라(Rosaura)의 극을 들 수 있다. 그녀의 공간이 극중극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등장하면서 남장을 했다는 점과, 그것이 작품의 마지막까지 독립된 극으로서 다른 극과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극작품 안에서 또 다른 변장을 할 경우, 원래의 모습과는 다른 역할을 수행하게 되고, 그와 만나는 인물들에게는 변장하지 않았을 때와는 다른 행동을 유발하게 된다. 그녀의 극은 일종의 ‘변장극’인데, 이것은 ‘가면극’을 포함하여, ‘극중인형극’과 같이 동일한 작품 속의 다른 극과 직접적인 영향관계에 있다. 한편, 로사우라의 변장과 그로 인해 미칠 세히스문도에의 영향은 분명 세히스문도를 변하게 하는 중요한 극으로 평가될 수 있어, 작품구도에 없어서는 안될 공간으로 정의된다. 세히스문도가 로사우라를 세 번 만났지만, 세 번 모두 다른 모습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산 속의 감옥 탑을 무대로 하는 바실리오의 외부극과의 만남이었으며, 나중에는 궁궐을 무대로 하는 내부극과도 소통하게 되니, 그녀의 극은 바실리오의 제1극과 제2극에 걸쳐있는 제3의 극이기에 더욱 흥미롭다.


III. Persona desnuda의 인간형


   한 작품에 또 다른 극 공간들을 배치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서, 특히 이들이 유기체적 관계를 통해 밀접하게 상호작용을 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면서, 우리는 이미 상정해놓은 Persona desnuda의 인간형이 이 독특한 구조를 통해 가시화 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특히 작품의 주인공 세히스문도를 통해 그 모습이 실현되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에, 『인생은 꿈』에서 세히스문도의 변화 원인과 과정, 그리고 유형을 극중극의 기능과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세히스문도에서 발견되는 Persona desnuda는 변화된 인간형이다. 인물의 성격이 작품 처음과 마지막에 상이하게 변한다는 사실은, 바로 작품내용이 그 행동(Acción) 변화의 과정임을 말해준다. 이런 관점에서 세히스문도에게서 발견되는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짐승에서 인간으로의 변화며, 상징적으로는 산에서 궁궐로의 위치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이 변화는 감옥 탑의 원시적, 고립적, 본능적 특징에서 궁궐적, 문명적, 사회적, 이성적 특징으로의 전환이다. 태어나자 감옥 탑에 갇혀 살았던 그가 바실리오의 극에 의해 궁궐에 들어와 처음 행한 일은, 자신의 뜻에 거역한다고 하여, 하인2를 발코니를 통해 연못(작품에는 ‘바다’로 표현됨)으로 내던지는 난폭한 행동을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물과 인간의 구분, 산과 궁궐의 구분은 이러한 세히스문도의 행위를 보고 아스똘포가 상징적으로 언급한 표현에서도 찾아볼 수 있겠다.


아스똘포: 자네의 과격한 행동은/ 좀더 여유를 갖고 재어보게나./ 인간과 짐승과의 차이는/

           산과 궁궐간의 차이만큼이나 큰 법이라네.(vv.1432-1435)


   한편, 이런 동물적, 비이성적 세히스문도에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과정들은 앞에서 언급한 특별한 구조인 극중극 때문이며, 이 상황들은 거울처럼, 주인공에게 삶과 꿈을 교차해주면서 기존의 자신을 되돌아보고 변하게 하는 장치가 된다. 세히스문도는 이런 과정을 ‘경험’이라고 정의하고, “경험이 날 가르쳤다.”(la experiencia me enseña), “살아있는 사람은/ 깨어날 때까지도 꿈꾸고 있는 것이다.”(vv.2155-2157)라고 말함으로써 삶이란 끝없는 경험의 연속임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작품의 내용으로서 하나하나의 매듭을 형성하는 경험들이라는 것들이 세히스문도가 만나는 극중극의 상황임을 알게 되며, 이것들은 갈등상황 속에, 최종적으로 형성될 인간유형을 결정짓는 원인이 되고 있음으로 보게 된다. 즉 극중극이 펼치는 극 내부의 효과는 극 前과 극 後의 상황이 달라진다는 사실인데, 그것은 이전의 상황을 더욱 확고하게 하는 방향으로의 변화도 될 수 있고, 전혀 이질적인 상황으로 반전하기도 한다. 『인생은 꿈』에서 극중극들은 세히스문도에게 순차적인 변화의 경험으로 작용하니, 단계를 거치면서 변화하는 그를 발견하게 된다. 바실리오의 극을 통해 세히스문도의 동물성이 증명되면서, 다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작품 처음과 같이 감옥이란 공간에 존재하지만, 극을 겪은 후 우리는 그가 이전과는 다른 사고를 가진 인간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세히스문도: 맞아,/ 그러니 언젠가 다시 꿈을 꾸게 되면,/ 이 짐승 같은 상황에서도/       

            분노와 욕망의 마음을 자제하도록 하자./ 아무렴, 그리 해야지./ 산다는 

            것이 단지 꿈꾸는 일에 불과한/ 아주 진기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 말이야.

            (vv.2148-2154)


   “분노와 욕망의 마음을 자제하도록 하자”는 표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궁궐에서 아버지 바실리오에게 대들었으며, 시종일관 강하고 잔인한 자기 성격대로 행동했지만, 막상 감옥 탑에서 눈을 떴을 때, 그가 느끼는 것은 후회와 순응의 자세이다. 

   이런 식으로, 『인생은 꿈』에서 바실리오의 극과 로사우라의 극은 세히스문도의 성격변화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변화된 세히스문도의 모습을 상기한다면, 바실리오 극과의 마찰을 통해 왕궁의 질서와 사회 및 문명세계를 경험하게 되며, 로사우라에게서는 여성과 인간적인 것에 눈을 뜨게 함은 물론이고, 이상 세계에 대한 희망을 배운다. 감옥 탑에서 동물처럼 살았던 그가 마지막에는 철학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변화의 극단을 보여준다. ‘철학적 존재’라는 것은 ‘형이상학적 존재’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는데, 단순하고 기본적인 물질이 복합적이고 상승된 가치의 물질로 화하는 모습이다. 여러 경험을 통해 철학적 반성이 지속적으로 이뤄지면서 삶에 대한 나름의 정의에 닿는다. 작품 마지막의 독백은 그의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


세히스문도: (...생략...) 만일 그렇지는 않다 해도,/ 그렇게 될 거라 꿈꾼다는 것 자체로도 

            충분하다./ 인간의 모든 행복이란,/ 결국 하나의 꿈처럼 지나가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vv.3310-3314)


   삶이란 환상이지만, 픽션이며, 잡을 수 없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면 굳이 뭔가를 소유하거나, 집착하려는 마음을 억제할 수 있다. Persona desnuda가 가지는 또 다른 모습은 이런 소유욕을 버리는 마음이며, 세히스문도가 내린 철학적 결론이기도 하다.


세히스문도: (...생략...) 산다는 게 뭐지? 하나의 열광./ 삶이란 뭐지? 하나의 환상./ 

            그림자며 허구일 뿐./ 최고의 선이라고 해봤자, 작을 뿐이다./ 삶이란 꿈이며,/ 

            꿈은 꿈일 뿐이다.(vv.2182-2187)


   현실에서 크다고 느끼는 것도 알고 보면, 작은 일에 불과하고, 최고의 선이라고 해봤자, 작은 것에 불과할 뿐이란 생각에 이른다. 이런 표현에 우리의 관심이 머물게 되는 것은 이미 극중극의 상승효과에 의해 철학자가 되어버린 세히스문도의 삶에 대한 정의이기 때문이다. 세히스문도가 철학적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까지 그에게 닥친 것은 삶과 꿈의 반복이었으며, 그 경험은 극중극을 통해 이뤄진다.


   둘째로, Persona desnuda는 대립요소의 포괄적 수용을 의미하는 포괄적 인간형이다. 일반적으로 이성과 열정을, 해와 달을, 빛과 그림자를 대립관계에 놓지만, 이 전제의 본질은, 전자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성은 열정에 비해 우월한 것이었으며, 해는 달보다 더 우위의 개념으로 봐왔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기독교에 바탕을 두고 있는 서양의 가치관으로 본다면 이런 이분법의 실체는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Persona desnuda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깔데론의 이상적인 인간상에는 대립되는 두 요소, 또는 여러 대립요소들이 모두 포괄되는 개념으로 풀이된다. 대립되는 두 개 중에 하나만을 선택하던 기존의 사고 틀과는 달리, 양자를 모두 인정한다는 말은, 역으로 양자를 모두 수용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특히 대립되는 요소들을 나열해보면, 가장 먼저 극간의 대립을 보인 인물들로 바실리오와 세히스문도가 있으며, 공간적인 측면에서는 궁궐(Palacio)와 감옥 탑(Torre)이다. 한편 하늘(Cielo)과 땅(Tierra)의 세계가 암시되며, 꿈(Sueño)과 현실(Realidad) 역시 중요한 대립관계에 있다. 이들이 하나의 선택만을 위해 양립되어 있지 않다면, 모순으로 보일지라도 전자와 후자의 교차가 가능하니, ‘인생은 꿈’이라는 정의와 함께, ‘꿈은 인생’이란 정의가 동시에 가능하며, 꿈과 인생에 대한 이런 정의 속에 삶이 현재와는 다른 차원에서 해석될 때, 이미 두 가지의 가치를 떠난 고차원의 삶이 정의된다. 사실 이 두 가치의 경계는 모호한 것이어서, 극중극이 만들어내는 현실과 픽션간의 벽 허물기 효과와 다르지 않다. 바실리오의 세계관과 세히스문도의 것이 동시에 결합되며, 궁궐과 탑, 하늘과 땅, 그리고 꿈과 삶이 동시에 긍정되는 새로운 차원의 가치관이 형성된다.

   이런 맥락에서 풀이한다면, 앞에서 언급한 Persona desnuda의 첫번째 유형에서 말한 인간형의 변화방향에 대해서도 짐작할 수 있겠다. 세히스문도가 자신의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동물적 본능과 열정은 바실리오가 만든 극에 의해 교육과 理性의 영향을 받아서 감해질 뿐, 원래의 뿌리를 제거 당한 것은 아님을 알게된다. 결국, 최후에 만들어진 세히스문도는 이성만으로 무장된 인물이 아니며, 이성도 열정도 모두 소유한 포괄적 인물이 된다.

   극중극의 구조측면에서 이 관계를 구체화해보면, 작품의 종결부분에는 기존 극이라고 보는 바실리오의 공간과 세히스문도의 공간이 조화와 균형을 이룸에 따라, 로사우라의 공간도 안정되고, 모든 요소들이 화합하는 쪽으로 결론이 이끌어진다. 이렇게 포괄적 인물형으로서의 세히스문도는 작품 현실에서는 사회의 모든 구성요소들을 갈등없이 화합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린 존재로 부각된다. 결국 포괄적인 수용은 화해와 조화, 그리고 균형의 원동력으로서의 인간형(Hombre de unión y harmonía)을 보게 한다. 바실리오와 세히스문도의 화해는 다음 표현에서 절정을 이룬다.


세히스문도: (...생략...) 마마, 일어나/ 손을 주시옵소서./ 하늘은 이미/ 아바마마게서 운명을

            이기려는 방법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습니다./ 폐하께서 보복하려던/ 

            제 목을 낮춰/ 폐하의 발 아래에 무릎을 꿇게습니다.

바실리오: 그래, 내 아들아. 너의 고귀한 판단이/ 다시 너를 내 품에 넣도록 만드는구나./ 넌 

          내 아들이며, 왕자니라./ 모든 행운과 영광이 네게 합당하구나./ 네가 이겼다./ 

          너의 위대한 공적이 네 왕관을 되찾게 하는구나.(vv.3241-3253)


   작품의 마지막에 세히스문도가 에스뜨레야와 결혼하겠다는 결정을 한 것도 이런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로사우라를 통해 여성에 대해 눈을 떴지만, 그리고 그것은 동물적 열정으로 풀이되지만, 마냥 자신의 열정과 본능을 강요하는 사람은 아니다. 바실리오로부터 왕자의 권리를 되찾은 후에 처음으로 내리는 판결에서, 아스똘포에게 처음 사랑을 나눈 로사우라는 처음의 결합대로 아스똘포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사회적 원칙을 지키는 결정을 내린다. 인간적인 이성과 종교를 포함한 사회질서의 차원에서 내린 포괄적 수용의 결과로 해석된다.


세히스문도: (...생략...) 아스똘포,/ 자네는 명예의 빚을 지고 있으니,/ 내가 그것을 돌려주려 

             하는구나./ 손을 즉시 로사우라에게 주게나.

             ...................................................................................................................................................

             이렇게 되니, 에스뜨레야 만/ 서럽게 됐구나./ 이렇게 용기있고,/ 유명한 

             사람을 잃게 되니,/ 내가 직접 그녀와 결혼할 것이다./ 칭찬과 운명에 있어서,/ 

             아스똘포를 능가하진 못한다 해도,/ 비슷하게라도 되리라./ 

             손을 이리 주시오.(vv.3258-3261),(vv.3278-3286)


   결국 변화된 세히스문도에게서는 사회안정과 균형을 중시하는 판결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감옥에서의 자신을 꺼내주고 왕자의 권리를 되찾게 해준 군인에 대한 판결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반란세력에 의해 권리를 회복한 세히스문도이지만, 높은 자리를 원하는 군인에게는 의외의 결정을 내리면서 개인의 순간적인 감정에서 벗어나, 사회질서와 안정을 중시하는 인간형으로 변해있음을 보여준다.


군인1: 전하의 명예를 지키지도 않은 사람에게/ 전하께 봉사를 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그런 결정을 내리신다면,/ 왕위를 회복하도록 도와준 저에게,/ 탑으로부터 구해낸 

       저에게 어떤 결정을 내리시겠습니까?

세히스문도: 탑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죽을 때까지 거기서 나오지 말아라./ 보초병이 너를 

            지키게 될 것이다./ 배반자는 시간이 지나면/그 가치를 잃어버리는 법이니라.(vv.3292-3301)


   이런 판결은 위에서 암시되었듯, 상대편이지만 끝까지 왕을 보위하려다 잡힌 충성스런 끌로딸도에 대한 너그러운 판결과 대비되는 것이다.

   포괄적 수용과 극중극을 말하면서 우리는 이중화(Doblamiento)란 용어를 생각해야 된다. 그것은 2배하는 것, 접는 것을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극을 하나 더 만드는 것임은 물론, 결론적으로 더 많은 극적 층을 형성할 가능성을 말해준다. 평면적으로는 한 장의 종이를 접는 것이지만, 입체적으로 본다면 양쪽에 거울을 배치해놓을 때, 생기는 끝없는 반영효과로 비유될 수 있겠다. 한편, 탈이중화(Desdoblamiento)란 단어가 상대적인 의미로 쓰인다. 평면적으로 접었던 것을 펼치며, 이중화에서 가렸던 부분을 내보이는 상태지만, 입체적으로 볼 때는 보다 추상적인 형태를 취하게 된다. 즉 탈이중화는 시각적으로 이중화되고 다층화된 대상의 본질을 찾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특히 극이라는 공간을 보았을 때, 입체적 이중화와 그것의 분해, 또는 해체를 생각할 수 있는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들은 상호적이어서 이 중 하나만을 빼서도, 강조해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극중극으로 이중화하고 그것을 탈이중화하는 작업의 궁극적인 방향은 이상(Lo ideal)의 형성이며, 이것은 포괄적 수용이란 개념과 일치된다. 극중극을 통해 형성된 Persona desnuda로서의 세히스문도는 이렇게 ‘대립되는 두 힘의 작용과 그 균형’(Un equilibrio de integración de fuerzas opuestas)이란 이상화된 존재이다. 극중극이란 형식의 이중성이 내용의 이중성으로 이어져 새로운 가치를 낳는다. 한편, 대립되는 요소의 공존, 또는 포괄적 인간형에는 깔데론이 추구하는 Persona desnuda의 모습이 현재에는 이상적이지만, 결국에는 변화될 수 있다는 개연성에 열려져 있다. 현재에 구성된 인물의 성격은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는, 그리고 이후의 재결합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일시적인 결합이며, 공존상태일 뿐이다.


   셋째로, Persona desnuda는 예정적 운명론(Predestinación)과 자유의지(Libre albedrío)가 조화된, 또는 결합된 인간형이다. 이 두 단어는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쳐 바로꼬에 와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연구되었던 개념이며, 바로꼬 사상의 중요한 테마이기도 하다. 이들은 원래 상호 대립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인데, 운명을 강조하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무시되고, 자유의지가 강조되면 반대로 운명의 끈이 무시되는 상황에 있어, 항상 공존할 수 없는 개념으로 만 생각해왔다. 한편 예수회의 자유의지에 대한 인정 및 강조에서도 발견할 수 있듯이 인간의 자유의지가 인정되고,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바로꼬이며, 이 때문에 운명과의 공존도 모색되었다. 『인생은 꿈』에서 세히스문도는 운명에 의해 출발된 자신의 삶을, 결국에는 극복하고 자유의지를 실현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사실 운명은 그의 최후까지도 관계하는 끈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즉 그가 아버지를 용서하고 덕을 회복한 존재가 되기까지는 운명이란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이 ‘삶이라고 하는 영원한 극의 연출자‘(Director del drama eterno de la vida)로 인식되고, 인간은 땅에 살고 있는 존재며, 그 사이에 ’은총‘(Gracias)이 나타나 상호간을 연결지으며, 지도를 해주고 있는 『세계는 대극장』에서의 상황을 접목해본다면, 땅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은 분명 하늘의 지도를 받고 있다는 기본에서 나온 말이다. 즉 두 개념은 서로 대립되는 것 같으나 그 대립의 영향은, 하나의 인간이 덕있고, 완전한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환경으로 설명된다. 이렇게 Persona desnuda로서의 세히스문도는 예정적 운명과 자유의지가 서로 합해져 만들어진 제3의 인물형이라고 정의될 수 있겠다.

   다시 극의 대립관계로 돌아가서, 양자의 극이 대립구도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바실리오의 극은 바실리오의 자유의지가 반영된 극이다. 왕은 자신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는 세히스문도에 대한 예정된 운명을 미리 막기 위해 단행한 반운명적인 행위이며, 자유의지의 실현이다. 한편 세히스문도의 극은 바실리오의 자유의지에 의해 만들어진 운명의 틀 속에 있으므로, 세히스문도가 나중에 자신의 자유의지를 편다는 것 자체는 바실리오가 처음 받았던 외부의 운명과는 관계가 멀어지게 된다. 바실리오의 자유의지는 하늘이 주는 운명에 역행하는 것이지만, 세히스문도의 자유의지는 신과는 관계없이 인간, 즉 왕이 부여한 운명에 반할 뿐이다. 극중극을 자유의지와 운명의 공간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은 그림이 그려진다. 



   대립되는 인물 간의 관계가 이렇다면, 바실리오가 세히스문도를 통해 맛본 실망과 질타는 당연한 일이다. 그는 사람을 죽이고 포학한 짐승의 행동을 보인 세히스문도에게 대단한 실망을 느낀다.


바실리오: 너의 야만스럽고 무엄한 모습을 보니,/ 결국, 하늘은 언약을 이루었구나.

          (vv.1520-1531)


   세히스문도를 아들로 맞은 왕이 예정된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행한 자유의지는 세히스문도에게는 운명의 틀로 바뀌면서, 세히스문도 나름의 자유의지와 대치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상황이 이러니, 왕자가 느끼는 자유의지에 대한 억압도 아버지인 바실리오왕에게서 오는 것이며, 왕에 대한 세히스문도의 불만은 당연하다.


세히스문도: 그 일 때문에,/ 감사를 드려야 한단 말입니까?/ 제 자유의지(albedrío)를 

            꺾어놓고,/ 이제는 나이 들어 시세 없이 죽어가는 마당에, 나에게/ 뭘 더 줄 수

            있단 말입니까?/ 합당한 내 몫 이상, 내게 더 주실 게 있단 말입니까?/ 내 

            아버지이시며, 왕이시지만,/ 그 외의 모든 고귀한 것들은/ 다름아닌 자연의 

            순리에 따라/ 주어진 것입니다./ 난 비록 이런 처지에 있지만,/ 왕에게 

            강요되어 있는 게 아니며(obligado no te quedo),/ 대신, 그 동안 나로부터 

            빼앗아간/ 자유와 세월과 명예에 대해서는/ 보상을 청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한 일입니다./ 왕께서는 나에게 채무자이기 

            때문입니다.(vv.1503-1519)


   왕이 임의로 만든 극(외부극과 내부극)은 신(또는 과학, 천문학)이 제시한 해결책이 아니었던 것이다. 별자리는 단지 바실리오와 세히스문도 간의 운명을 말했을 뿐, 어떻게 해야 왕이 죽음을 피할 수 있는지 명시하지 않았다. 결국 작품은 처음 천문학이 예시해 준 운명과는 다른 방향의 결론이 내려진다. 어머니는 왕자를 낳으면서 죽었지만, 왕은 무사했으며, 세히스문도는 폭군이 될 것이란 운명에서 덕망있는 왕자로 변신한 것이다.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나눠질 것이란 운명과는 달리 모든 국민들이 하나가 되어, 더욱 공고한 나라를 만들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다면 세히스문도의 자유의지는 하늘의 운명을 거역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지만, 우리는 이미 세히스문도에 직접 닿는 운명의 영역이 바실리오왕의 그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으니, 하늘의 운명과 세히스문도의 자유의지 사이에는 바실리오의 극중극이 매개가 되면서 타협되고 승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넷째로, Persona desnuda는 자기성찰과 자기극복에 기반을 둔, 적극적, 혁신적 인물형을 말한다. 현실과 타협하기보다는 변화와 개혁의 성향을 가진 존재다. 사실 세히스문도가 궁궐에 왔을 때, 주변에서는 그가 본능적 행동을 버리고 왕이 의도하는 바대로 행동한다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이렇게 바실리오왕이 기대했던 인물로서 존재한다면 모든 부와 명예를 차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히스문도는 다른 선택을 하다가 다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최후로 남은 세히스문도의 모습은 원래 바실리오왕이 기대했던 이상적인 인물상과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처음 세히스문도의 모습도 아니지만, 바실리오가 의도했던 모습도 아닌 제3의 형태로 화한 인간형이기 때문이다. 세히스문도가 자신을 이겨내려는 의도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세히스문도: 누구를 이기는 큰 승리를/ 기대했으나,/ 오늘에야 내가 나를 이기는 것이/

            가장 큰 승리임을 알겠구나.(hoy ha de ser la más alta vencerme a mí).

            (vv.3255-3258)


   그의 자기극복 자세는 현실에 대한 긍정적 자세를 가진 세히스문도를 보게한다. 『인생은 꿈』이나 『세계는 대극장』(El gran teatro del mundo)에서 자주 쓰이는 ‘Obra bien’의 의미를 새겨본다면, 일을 잘 마무리 짓는다거나, 잘 해야한다는 다짐이 들어있으며, ‘인생은 꿈’이라는 표현이 줄 수 있는 허망한 의미, 포기하려는 소극적인 자세와는 다른, 적극성이 엿보인다. 특히 “일을 잘 처리하라, 신은 신이시다.”(Obrar bien, que Dios es Dios.)란 표현과 “일을 잘 해라. 신께서 너와 함께 있느니라.”(Obra bien y Dios está contigo.)에서, 신은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계시며, 지금의 고난은 분명 예정하신 것이므로, 그가 사랑하는 자신의 자식을 그대로 남겨두지 않을 것이란 생각 속에 희망을 되찾을 수 있는 위안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신은 신이므로, 지금 어려운 상황에서 과연 신이 있을까? 있다면 왜 이렇게 나의 시련을 못 본 체하는 것일까?하는 푸념을 넘어 언젠가는 나를 구해주시고, 뭔가 예비하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단락이다. 세히스문도가 민중들과 반란을 일으키고 만난 끌로딸도에게 처음부터 관용을 베풀면서, 역시 일을 잘 처리할 것을 말한다.


세히스문도: 바닥에서/ 일어나시오./ 그대는 아버지로서/ 나를 이끌어주실 안내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자라는 데, 당신의 충정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걸 알고 있소./ 

            그 팔을 주시오.

끌로딸도: 아니, 뭐라고 하셨사옵니까?

세히스문도: 나는 꿈을 꾸고 있다 해도, 일은 제대로 하고 싶소./ 꿈속에서라도 난 일은 

            잘 처리해야 하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Que estoy soñando, y que quiero/ 

             obrar bien, pues no se pierde/ obrar bien, aun entre sueños.)

             (vv.2392-2401)


   한편, 2420-2427행에서는 끌로딸도를 용서한 후 민중들을 이끌어 가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히스문도: 운명이며, 통치하러 떠나자./ 내가 꿈꾸고 있는 것이라면, 깨지 말 것이며,/ 

             이것이 현실이라면, 날 잠들게 하지 말아라./ 그러나 사실이든 꿈이든,/ 일은

             잘 처리해야 하는 게 중요하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바로 그 현실을 

             위해 그러하며,/ 현실이 아니라 하면, 깨어날 때/ 친구를 준비한다는 마음으로 

             그래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꿈이라면 현재의 고통을 허망한 것으로 보고,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 것이나, 여기서는 그게 꿈이건, 생시건간에 중요한 것은 잘 만들어나가는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현실을 잘 만들어나간다는 의미에는 현실을 최대한 즐기자는 사상이 담겨있다. 영화와 고통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현재의 쾌락이 있다면 놓치지 말라는 생각에서 나온다. 이런 판단에는 쾌락 다음에는 고통이 온다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로사우라와의 대화에서 세히스문도는 “이것은 꿈이다. 이왕 꿈이라면/ 지금은 행복을 꿈꾸자./ 후에는 그것이 슬픔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vv.2964-2966)라고 말하면서, 이 점을 강조한다.

   ‘꿈’(Sueño)이란 단어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수면 상태에서의 꿈과 삶의 희망과 이상으로서의 꿈이다. 결국 세히스문도의 적극적이고 혁신적인 자세는, 잠잘 때의 꿈으로 상정된 극중극을 통해, 현실에 대한 꿈(희망)을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다섯째, Persona desnuda는 현실상황을 뛰어넘는 정치적으로 이상화된 인물형이다. 여기서 현실상황이란 무엇보다도 바실리오가 왕으로 되어 있는 정치상황을 지칭해야 할 것 같은데, 세히스문도가 바실리오적 인간형의 상속자로 남지 않게 된 근본 이유는 그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행위 때문이며, 그것이야말로 바실리오의 한계를 뛰어넘는 왕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극의 현재에 존재하는 바실리오의 정치 세계는 사실상 완전하고 이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즉 아스똘포와의 대화에서 언급되듯이, 왕비가 죽었으며, 다음 대를 이을 왕자가 없고, 왕은 노년이 되어 국내외로 불안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의도했던 인물대로 세히스문도가 처음부터 변해있었다면, 바실리오체제를 뛰어넘을 왕을 기대할 수 없었지만, 극중극의 과정을 통해 미래에 맞을 세히스문도의 인간형이 형성되는 것이다. 결국 세히스문도의 적극적인 태도는 현재의 문제를 극복하고, 이상적인 정치를 구현할 존재의 탄생을 암시한다. 극중극으로서 세히스문도의 극과 바실리오의 극이 작품에서 갈등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상적인 차원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사실 이 작품은 인간의 변화과정을 말하고는 있지만, 어찌보면 바실리오왕의 정치적 목적이 더욱 두드러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인 의미에서 이상화된 왕의 유형에 더 관심을 쏟게 한다. 즉 세히스문도에게 처음 예정되었던 바는 다음과 같았다.


바실리오: 난 천문학을 믿고,/ 그 내용을 따라 보니,/ 거기에 세히스문도가/

          지나치게 무모한 인간이 될 것이며,/ 잔인한 왕자가 될 것과/ 결국에는,/ 포악한 

          왕이 되어,/ 왕국은 분열되고 흩어지며,/ 반역이 판을 치고,/ 악이 지배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맹렬한 천성을 갖고/ 천인공노할 죄로/ 나를 때려눕혀,/

          쫓아버리게 될 것이며,/ 난 그의 발치에 엎드려,/ (아, 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란

          말인가!)/ 나의 흰 머리칼은 그의 발 밑 바닥깔개가 될 것이란 

         예언이었다.(vv.708-725)


   결국, 세히스문도를 감옥에 가둘 생각을 한 바실리오의 결정은 미래의 재앙을 부를 원인을 제거하자는 의도와 함께, 아무래도 ‘포악한 왕’(Monarca más impío)를 ‘이상적인 왕’(Monarca ideal)으로 만들기 위한 결단으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세히스문도의 인간형을 정치적인 측면에서 해석한다면, 세습되는 왕으로 위에서 군림하며, 민중의 지지가 없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왕위가 외국인에게 넘겨질 상황에서 국민들을 구해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며, 그가 위로부터 권력을 차지하려 한 것이 아니라, 민중이 그를 필요로 해서 추대된 왕이기 때문이다. 그가 왕이 된다는 것은 민중의 지지기반이 확실한 상태며, 태어날 때의 운명과는 정반대의 상황을 만들어낸다. 외국인이 아닌 폴란드의 정당한 왕자로 노쇄한 왕위를 잇게된다. 그를 추대하기 위해 온 무리를 대표해서 군인1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인1: 위대하신 세히스문도 왕자님/ 저희들이 가져온 표적들이/ 바로 왕자님과 

       일치하기도 하지만,/ 저희들은 진정한 믿음으로 왕자님을 추대하려 합니다./ 

       당신의 아버지,/ 위대하신 바실리오 왕께서는/ 스스로 왕자님의 발 아래에/ 굴복할 

       것이란/ 하늘이 내린 운명이 성사될까 두려워,/ 왕자님으로부터 모든 권리를 

       빼앗고,/ 그것을 모스꼬비아의/ 아스똘포 공작에게 넘겨주려 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의회를 소집했지만, 미천한 저희들은/ 이미 우리의 왕자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외국인이 들어와,/ 명을 내린다는 건 원치 않사옵니다. 

       (...생략...)(vv.2276-2292)


   그래도 세히스문도가 자신에게 전개된 새로운 상황을 믿지 않자, 군인2가 밖에 많은 군중들이 왕자의 명을 받기 위해 모여있음을 말한다.


군인2: 저희들이 왕자님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전하 눈을 들어/ 저기 저 산을 

       바라보소서./ 왕자님께 복종하고자/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일 것입니다.(vv.2344-2348)


   한편, 세히스문도가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갖추게 되기까지는 로사우라의 극이 차지한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그녀가 남장하여 등장한 것은 가장극의 예로 극중극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특히 그의 이름은 Ros(Rocío)와 Aura(Aureo/Aurora)의 합성으로 이해되어, 황금시대(Edad de Oro)를 예측케 하는데, 이는 자신의 신분을 속이기 위해 지어낸 Astrea라는 이름을 통해서도 추측될 수 있다. 먼저 쥬피터와 떼미스 사이에 태어난 Astrea는 정의의 여신이면서 황금시대 최후의 증인이어서, 작품에서 그녀가 등장하고 세히스문도를 깨우치게 하는 존재로 나오는 것은 세히스문도를 통해 황금시대를 구현하도록 하는 바램이 투영되었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황금시대는 동양의 요순시대처럼 완전한 정치가 구현되었던 시대로 알려진다. 로사우라의 등장은 이러한 이상국가에 대한 지향을 암시해주며, 어둠과 죽음에서 빛과 삶으로의 인도를 의미한다. 세히스문도가 살고있는 세상은 '어두운 감옥'(Prisión oscura)(v.93), '무덤'(Sepulcro)(v.195)이며, 따라서 세히스문도라는 존재는 '산해골'(Esqueleto vivo), '죽은 영혼'(Animado muerto)(vv.201-202), '산송장'(Vivo cadáver)(v.94)이라고 본다면 빛을 상징하는 Astrea는 어둠과 죽음에 빛과 삶을 가져오는 존재로 인식된다. 그녀가 도착하자 세히스문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히스문도: 그대의 목소리는 내 마음을 녹이고,/ 당신의 모습은 날 놀라 멈춰버리게 하며,/ 

            그 예절바름은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니,/ 대체, 당신은 누구요?(vv.190-193)


   그녀의 출현은 마치 빛처럼 표현된다.


세히스문도: 그녀의 강한 빛이 내 눈을 부시게 하는구나.

끌라린: 세상에, 로사우라께서 오십니다. (나간다)

세히스문도: 하늘께서 내게 그녀를 되돌려 보내셨구나.(vv.2688-2689)


   즉 그녀는 세히스문도에게 처음으로 인간의 감정을 느끼게 하여, 어둠과 죽음에 빛과 생명을 주면서, 결국에는 진정한 폴란드의 왕자가 되도록 인도하는 존재가 된다. 추종자들과 함께 감옥을 나서는 세히스문도의 머리에는 황금세기가 먼저 떠오르는 것은, 로사우라가 등장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드디어, 그는 군인들을 이끌고 진격하면서 황금세기를 염두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황금시절의 로마가 오늘 날 본다면,/ 얼마나 기뻐하겠는가.(Si este día me viera/ Roma en los triunfos de su edad primera.)/ 일개 짐승에 불과한 존재가 군사를 통솔하게 되는/ 아주 희귀한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행운이며 즐거운 일인가! 그 높은 기백에/ 하늘도 수그러지는구나.”(vv.2656-2663)


   로사우라나 그의 가명 아스뜨레아가 ‘정의의 여신’이며, 황금세기 ‘최후의 증인’이라면, 그녀는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메시지를 전해주기 위해 세히스문도에 나타난 지표로 해석되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결국 로사우라는 假裝을 통해 세히스문도에게 3개의 이질적 경험, 또는 극을 제공하면서 변화를 이끌어왔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을 극간의 위치를 감안하여 그려본다면 다음과 같다.



   바실리오와 세히스문도는 하층, 즉 현실적으로 대립하지만, 로사우라의 극은 상위에 위치하면서 이상화된 세계로의 발전을 상징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세히스문도가 로사우라의 출현에 대해, “로사우라는 이제 내게 힘이 되었으며,/ 그녀의 아름다움은 내 영혼을 상승케 해주었다.”(vv.2965-6)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상승효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섯째, Persona desnuda는 이성과 인간성 및 신성을 회복한 인간형을 말한다. 이성적이라는 말은 종교적이란 말로 통하며, 바로 바로꼬적 세계관이기도 하다. 바로꼬의 개념으로 본다면 인간이 태어나 그대로 둘 경우에는 인간 본능에 따라 열정만이 커져 동물적 존재로 남으므로, 진정한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성을 회복하는 일이며, 그것은 바로 종교적 교육을 통해 이뤄진다는 생각을 하였다. 따라서 세히스문도가 동물적인 존재에서 인간적인 존재로 변하는 것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세히스문도의 처음 모습은 짐승-인간(Fiera-Hombre)의 모습이었다. 인간의 형상을 갖추고 있지만, 그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바는 동물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극을 통해 변해질 수 있는 방향은 인간-신(Hombre-Dios) 모습의 회복이며, 신을 닮아가는 일이다. 바실리오가 표현하는 태어날 때의 세히스문도는 바로 짐승과 같은 인간이었다.


바실리오: (...생략...) 끌로리레네는 아이를 낳으면서/ 수없이 기절을 했고,/ 비몽사몽의 

          혼수상태에 빠져,/ 오락가락하다가/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이/ 그 배를 터치고 

          나오는 것을 보았단다./ 전대미문의 인간 독사는 태어나면서/ 그녀를 피 속에

          죽게 하였단다. (...생략...)(vv.668-675)


   한편 감옥 탑에 갇힌 세히스문도가 발견한 자신의 모습은 ‘인간괴물’, ‘짐승 중의 인간’이었다.


세히스문도: 그가 전해주는 소식을 통해 그래도 하늘과 땅에 대해/ 알게 되었소./ 비록 

            당신이 날 보고,/ 놀람과 상상 속에/ 괴물 인간이라고 말하지만,/ 나 역시 

            인간 모습의 금수요,/ 금수 모습의 인간이라오. (por quien las noticias sé/ de 

            cielo y tierra; y aunque/ aquí, porque más te asombres/ y monstruo humano 

            me nombres,/ entre asombros y quimeras,/ soy un hombre de las fieras/ y 

            una fiera de los hombres;)(vv.206-212)


   한편, 궁궐로 이송된 세히스문도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바실리오가 꾸짖자 이에 대항하는 대목에서 자신을 인간과 짐승의 혼합체라고 말한다.


세히스문도: 이젠 내가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누군지를 알게 되었고,/ 내가 인간과 짐승의 

            혼합체인 것도 알았습니다. (Pero ya informado estoy/ de quién soy, y sé 

            quién soy:/ un compuesto de hombre y fiera.)(vv.1545-1547)


   이런 상태에서 보여줄 세히스문도의 행동은 '복수‘, ’노여움‘, ’자만‘, ’죽음‘, ’광분‘, ’불화‘, ’가혹‘ 등일 수밖에 없다. 로사우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사우라: 당신의 횡포가 불행한 나라에/ 중죄와 반역,/ 재앙과 죽음을 가져올 것이라는/ 

          예언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모하고, 비인간적이며,/ 잔인하고, 자만에 

          빠져 있는,/ 야만스럽고, 난폭하며, 동물 사이에 태어나,/ 다만 인간적인 

          것이라고는 이름밖에는 없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qué ha 

          de hacer un hombre, que no tiene de humano más que el nombre,/ atrevido, 

          inhumano,/ cruel, soberbio, bárbaro y tirano,/ nacido entre las 

          fieras?)(vv.1650-1658)


   태어난 형상은 인간이지만, 열정과 본능은 동물과 다름없으니, Hombre-Fiera로 표현되었다. 한편, 이런 인간은 이성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인간으로 형성되는데, 이것은 교육이 담당하며, 종교성의 회복에 바탕을 두고있다. 이 때의 모습은 Dios-Hombre로 표현되는데, 인간이 신의 모습을 닮아간다는 의미를 가진다. 결국 타고난 동물성을 억제하고, 신성을 배우는 과정이 이 작품 내의 극중극들이 담당하는 역할이다.



   바실리오왕은 아들 세히스문도에 대한 미련으로 궁궐에 다시 불러 그에 대한 운명이 잘못되었으며, 동물적인 천성을 버리고 왕자다운, 또는 인간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는 지 시험해봤으나, 실제는 달랐다. 이어 세히스문도는 다시 감옥으로 추방되는데, 그가 깊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말하는 독백에는 Dios-Hombre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보여준다.


세히스문도: 맞아,/ 그러니 언젠가 다시 꿈을 꾸게 되면,/ 이 짐승 같은 상황에서도/ 분노와 

            욕망의 마음을 자제하도록 하자./ 아무렴, 그리 해야지./ 산다는 것이 단지 

            꿈꾸는 일에 불과한/ 아주 진기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 말이야./ 경험이 날 

            가르쳤다./ 살아있는 사람은/ 깨어날 때까지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왕은 

            자신이 왕인 것을/ 꿈꾸는 것이며,/ 그 거짓 환상 속에 명령하고/ 통치하는 

            것이니,/ 임시로는 박수를 받을지라도,/ 그 찬사는 바람 속에 흩어지며,/ 죽음은 

            모든 것을 재로 만든다. (슬픈 일이로다!)/ 죽음의 꿈에서 결국은 깨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누가 과연 세상을 다스릴/ 엄두를 

            내겠는가?(vv.2148-2167)


   결국 “짐승 같은 상황에서도/ 분노와 욕망의 마음을 자제하도록 하자.”라거나 “경험이 날 가르쳤다.”라는 표현에서는 경험을 통한 A에서 B로의 변화를 암시해준다. 그가 바실리오왕을 용서하고 피를 보지 않는 결정을 내린 것은 이미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을 회복했기 때문이며, 자신이 권력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로사우라를 아스똘포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에스뜨레야를 후차적으로 선택하는 결정도 바로 이런 면모를 말해준다. 즉 본능과 열정을 억제한 그의 판단은 감정이 상하자, 즉시 창 밖으로 내던지고 칼부림을 하던 처음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일곱째, Persona desnuda는 오히려 궁정인의 옷을 회복한 ‘옷입은 인간형’(Persona vestida)의 모습이기도 하다. 작품의 무대를 보건대, 먼저 궁궐에서 태어난 세히스문도는 산 속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나중에 그가 안착하게 되는 장소는 다시 궁궐이 된다. 즉 그는 먼저 궁정인의 옷을 입고 태어났으나, 감옥에 갇히면서 원래의 옷을 벗고,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쓰게 되었으니, 1막 2장에서 세히스문도는 동물의 가죽을 입고있음이 설명되고 있다. “(사슬에 묶여 있는 세히스문도가 짐승 털로 몸을 감싼 모습이 드러난다.)“(Descúbrese Segismundo con una cadena y la luz, vestido de pieles.)(vv.101-102사이) 

   한편 2막 3장의 첫 번째 해설에서는 궁궐에 들어오는 세히스문도에게 여러 신하역할을 담당한 인물들이 그에게 궁궐의 옷을 입혀준다. 궁궐에 맞는 옷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음악대가 노래를 하면서 나오고, 하인들은 세히스문도에게 옷을 입히고 있는 가운데, 세히스문도가 놀란 표정으로 등장한다.)”(Salen músicos cantando, y criados, dando de vestir a Segismundo, que sale como asombrado.)(vv.1223-1224사이)

   그러나 궁궐에서의 테스트가 끝난 후 다시 감옥에 왔을 때, 그의 모습은 궁궐의 옷을 벗고, 원래의 짐승가죽을 입은 모습이기도 하다. 2막 17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세히스문도는 처음처럼 짐승 가죽을 걸치고, 사슬로 묶인 채 바닥에 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끌로딸로와 끌라린, 그리고 두 명의 하인들이 등장한다.)“(Descúbrese Segismundo como al principio, como pieles y cadena, durmiendo en el suelo.)(vv.2017-2018사이)

   그가 아버지인 왕과의 결투를 위해 행진하는 모습도 아직은 짐승가죽 옷을 입은 상태에서이다. “(군인들이 군악과 함께 행진하면서 등장하고, 짐승 가죽을 입은 세히스문도와 끌라린이 함께 나온다.)“(Tocan y salen marchando soldados, Clarín y Segismundo, vestido de pieles.)(vv.2655-2656사이)

   이런 과정을 보았을 때, 작품의 말미에 세히스문도가 왕자로서의 지위를 회복하였다면, 당연히 그의 의복을 되찾는 모습이 그려질 것이다. 작품에는 직접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바실리오는 자신을 살려준 왕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우리의 추측을 확인해준다. 


바실리오: 그래, 내 아들아. 너의 고귀한 판단이/ 다시 너를 내 품에 넣도록 만드는구나./ 넌 

          내 아들이며, 왕자니라./ 모든 행운과 영광이 네게 합당하구나./ 네가 이겼도다./ 

          너의 위대한 공적이 네 왕관을 되찾게 하는구나.(vv.3248-3253)


   말하자면 Persona vestida에서 출발하여, Persona desnuda가 되었으며, 다시 Persona vestida로 돌아오는 일련의 과정이다. 즉 옷을 벗었다는 것 자체가 주는 이중적인 의미를 여기서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이중화와 탈이중화를 동시에 이뤄지는 일치된 의미로 봤던 것과 다르지 않다. 즉 옷을 벗는다는 것에는 오히려 본래의 옷을 회복하는 것이며, 입는 다는 것은 원래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매우 형이상학적인 단계까지 의미가 발전한다. 작품에서 이미 궁궐과 감옥간의 장소 변화가 양자 중 한 쪽이 승리했다는 것보다는 새로운 가치로의 상승이라고 말했듯이, 옷을 벗는 것과 입는 것의 이런 동일한 의미 속에는 또 다른 형태의 옷 벗기, 진정한 옷 입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IV. 맺는 말


   스페인 황금세기 작품에서 소설 속의 소설이나 그림 속의 그림 및 극 속의 극이란 구조는 너무나 일반화되어 특별한 기법은 아니다. 물론 이후의 작가들에 의해 이 기법이 자주 쓰였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기법과 효과가 구체적으로 이론화되고, 특히 극에서 이 기법은 의도적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기법이면서, 혁신적인 방법으로 모색되고, 발전되었다고 정의할 수 있겠다. 한편 우리의 관심은 단순한 이중구조에 대한 이해나, 거울효과에 대한 일반적 범위를 넘어서, 극에 구현된 극들이 상호관계를 통해 중심인물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단순한 인물간의 대립차원에서 풀이되었던 이런 관계가 이렇게 극과 극의 대립관계로 확대되면서,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일단 스페인 황금세기 및 바로꼬의 최고작가이며 완성작가로 꼽히는 깔데론의 작품을 통해, 극중극적 방법이 구현해 내고자하는 인간형, 즉 Persona desnuda은 어떤 모습이며, 어떻게 형성해내고 있는가 연구해봤다. 극중극으로 분석해 본 이 작품은 먼저, 내적 구성과 외적 구성으로 구분해서 다뤄야 하지만, 본고에서는 작품 내적인 상황에 만 초점을 맞춰 분석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생은 꿈』에서 세히스문도라는 인물이 Persona desnuda의 대표적 유형이라 보고, 그의 변화를 통해 인물유형을 단순화해보면, 첫째, 변화된 인간형, 둘째, 포괄적인 인간형, 셋째, 예정적 운명과 자유의지가 결합된 인간형, 넷째, 적극적이고 혁신적인 인간형, 다섯째, 이상화된 인간형, 여섯째, 신성이 회복된 인간형, 일곱째, 새로이 옷을 입은 인간형 등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유형의 인물을 구현해내기 위해, 작가는 극중극이란 장치를 매우 치밀하고 효과적으로 적용하고 있음도 연구해봤다. 형식과 내용이 너무나 이상적으로 결합된 이 작품을 통한 본 연구가 다른 작품 분석에도 새로운 방법으로 제시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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