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강의] '등장인물'인가, '작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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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Q] 나, 돈키호테는 기사!

그런데, 사람들은 ‘기독교적 편력기사’(Caballero Cristiano)라고들 말하지!    뭔가 이상한 표현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게 ‘나’인 것도 부인할 수 없네!

용어 중에 이중적이고 모순성이 보이는 것 중의 하나가 ‘기독교적 휴머니즘’(Humanismo Cristiano)라는 표현이다. ‘기독교’라는 것 자체에 ‘인간’이 중시되는 것도 당연하지만, 실상 최상의, 그리고 절대적인 가치에는 ‘신’이라는 존재가 있는 것이고, ‘기독교’라는 단어를 굳이 ‘휴머니즘’이라는 것과 병치하여, 하나의 용어가 되었다면, 더욱 더 ‘신성’과 ‘인간성’이라는 가치가 병존하는 표현임은 분명하다.

사실이 이렇다보니, 당시 어떤 이유이든 ‘기독교’의 가치와 ‘휴머니즘’의 가치가 아주 ‘적당하게’ 조합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음을 예측하게 되며, 이런 혼합의 조건이라면, 조합의 형태에 따라 자연스럽게 ‘애매모호성’(Ambigüedad)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음도 충분히 인식하게 된다. 하나의 가치만의 절대성을 강조할 수 없는, 그런 불가피한 상황에 닿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엘 그레꼬(El Greco)의 [성가족](La Sagrada Familia)

같은 선상에서 ‘돈키호테’는 단순한 ‘기사’가 아닌, ‘기독교적 편력기사’라는 것으로 명명되기도 한다. 위의 경우처럼, ‘편력기사’에게 ‘기독교’라는 것이 상충되는 이유 중의 가장 큰 것이 바로, 기사에게는 ‘여인’(Señora, 작중에서는Dulcinea)의 존재 때문이다. 이미 돈키호테는 이전의 기사도 책에서 기사들이 여성, 즉 여인을 상정해 놓고 있으며, 모험의 시작과 끝은 바로, 그 여인과 연결돼있다. 기사들에서 여인은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위치를 점하기도 하는데, 거기서 ‘명예’(Honra)가 나오고, 그 명예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 싸워야 하는 게 기사였기 때문이다. 어떤 행위에는 목표와 목적을 포함한 ‘이상’, 그리고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소설, ‘돈키호테’에서는 이런 상충된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 지가 궁금할 수 밖에 없다. ‘종교개혁’(Reforma)의 거센 바람이 있는 후, 기존의 가치관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 수습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가장 많이 했던 ‘반종교개혁’(Contrarreforma)의 시기가 바로 그 때였기에 더욱 흥미롭다.
루벤스의 [성가족]

작품에 대한 ‘검열’(Censura)도 심해지고, ‘종교재판’(Inquisición)을 통한 엄한 처벌이 있었던 시기였으니, 기사소설, 즉 기사의 이야기를 쓰면서 세르반테스는 이 점에 대해 대단히 신경을 써야만 했을 것이다. 특히, 그는 스페인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이미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하지만, 그것이 종교적으로 근본적인 변화(Verdadero converso)일 수도 있고, 자기가 살고 있는 스페인이라는 지역에서 생존하기 위한 방편(Falso converso)일 수도 있다. 다만, 실질적으로 당시 시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크게 요동치던 사회 변화를 가장 첨예하게 접촉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 세르반테스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편력기사’와 ‘기독교’의 상충, 더 시대적으로 확대해보면, ‘기독교’와 ‘휴머니즘’의 모호한 공존에서, 작품 중 돈키호테는 역시, 애매모호한 입장을 보여준다. 즉 용어가 보여주는 바 그대로, ‘기독교적 편력기사’의 입장에 서있으니, 그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여인을 상정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동시에 신을 언급하고, 언급의 순서를 여인을 먼저 신 나중에 하는 1권에서의 경우와, 신을 언급하고, 다음으로 여인을 언급하는 2권에서의 경우처럼 글을 쓰면서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인지의 끈을 계속 유지할 수 밖에 없다.
   
벨라스께스의 [동방박사들의 경배]

사실 이런 ‘애매모호성’은 검열과 종교재판의 근거를 없앤 것은 물론이고, 이런 저런 상황에 대한 설명은 뒤로하고, 세르반테스 자신이 느낀 인간과 신과의 관계, 구체적으로는 삶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반영이라고도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죽음을 앞에 둔, 돈키호테에게는 이미 편력기사의 면모는 사라지고, 온전히 기독교인으로서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모순된 두 개념이 하나로 정리되는 형태로 설명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갖은 모험 뒤 얻은 그 만의 철학적 귀결, 또는 ‘영적 성숙’(Evolución espiritual)으로도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개념으로 본다면, 인생의 여러 모험은 ‘열정’(Pasión)을 ‘이성’(Razón)으로 돌아오게 하는 종교적 교육과정이기도 하며, 동시에 기사인 ‘돈키호테’가 기독교인인 ‘알론소 끼하노’(Alonso Quijano), 즉 라 만차의 시골 사람으로 회복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고야의 [성가족]

어쩌면, 시대적 상황에서 발생한 개념의 상치와 대립, 그리고 그것을 풀기위한 다양한 시도와 그 과정에서 펼쳐진 현실적 애매모호성이 결국 ‘돈키호테’의 태생적 환경이었다고 보면, 이런 이유로 인해, ‘돈키호테’는 이미 소설적 기본을 갖추고 태어났음도, 문제의 제시와 그 실행, 그리고 변화의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겠다. 애매모호성이 우리 주변의 상황에 대한 ‘진실’, 또는 ‘규정’ 중, ‘보편성’과 ‘특수성’ 중에 당연히 ‘보편성’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도 기억할 만 하다.
                                   
가우디의 [성가족]

우리는 ‘돈키호테’의 위대성을 말하지만, 도대체 뭐가 재미있고, 뭐가 그리 높게 평가받을 만한 점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는다. 그러나, 작품을 깊이 읽게 되면, 세르반테스의 글쓰기 의도를 이해하게 되고, 작가의 천재성과 해박함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가 속한 시대의 문제를 고스란히 반영해 내면서, 동시에 시대를 넘어 지금 우리의 문제에까지 닿고 있는 요소들을 발견하게 될 때, 비로소 ‘위대성’을 인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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