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이야기] 벨라스께스, 그림 속으로 들어가다! (Velázquez, o el caballete fantástico)(IV-3)
- 공유 링크 만들기
- X
- 이메일
- 기타 앱
벨라스께스, 그림 속으로 들어가다!(IV-3)
벨라스께스는 1599년 6월 6일 세비야에서 태어난다.
이 시기는 스페인이 정치적으로 하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으며, 그가 성인이 되어 세상에 대해 더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스페인이 과거의 것을 단지 향수로 밖에는 접할 수 없었던 시점이었다.
카톨릭 양왕에서 시작된 스페인의 영광은 그들의 손자 격인 까를로스1세 때에 더욱 무르익어 갔으며, 1598년 까지 통치한 펠리뻬2세에 이르러서는 가장 넓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으나, 그것도 잠시, 당대에 벌써 쇠락을 맛봐야 했다.
영토가 워낙 넓고, 다양한 지역에 위치하다보니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고, 전쟁과 아메리카대륙 진출로 스페인 본토의 인구는 날로 줄어만 갔다. 그리고 하락하기 시작한 스페인은 펠리뻬3세에 이어 벨라스께스가 궁정화가로 있었던 펠리뻬4세 때에는 이전 시대에 비한다면 아주 저 밑에까지 닿았던 것이다.
고향 세비야에서 처음 프란시스꼬 빠체꼬를 만나 그림을 배우게 되었고, 이 당대 그림을 대표하는 선생은 제자의 성공을 점쳤으며, 그 믿음 속에 딸을 내주기도 하였다. 그는 1622년 당대 최고의 문인인 루이스 데 공고라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마드리드와 궁정생활이 시작된다.
물론 남부 세비야를 중심으로 일어난 그림의 추세는 당시 유럽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마드리드로 상경하여 많은 작가들 사이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의 인생에 절대적인 전환의 기회가 된 셈이다. 사실주의에 바탕을 둔 스페인 전통 기법을 터득하였던 것을 시작으로, 이미 그리이스 출신으로 이태리에서 공부한 뒤 스페인에 귀화해 이곳 그림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엘 그레꼬가 있었고, 띤또레또의 그림 경향 역시 마드리드 생활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 기초가 탄탄해 질 수밖에 없었다.
1628년 유럽 땅을 전전하며 여러 활동을 한 루벤스가 스페인에 방문한 사실은 우물 안의 벨라스께스에게 중요한 변화의 계기를 마련한 일이 되고 만다. 드디어 이듬해 8월 화가는 3년간의 이태리 학업의 길에 접어들었으며,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그림을 모방하고, 르네상스의 고전적 분위기에 젖어 살면서 ‘야곱에게 보내진 요셉의 피묻은 외투’와 ‘불카누스의 대장간’ 등을 그린다.
물론 그가 스페인에 다시 돌아 온 후에는 ‘브레다의 항복’과 같이 고전적, 신화적, 르네상스적 그림과 스페인 자체의 분위기에서 나오는 종교성 짙은 작품이 동시에 나온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나 ‘성모의 대관식’이 바로 그것들이다. 1649년 두 번째로 이태리를 방문하고 돌아온 벨라스께스는 기존 회화를 뛰어넘는 대담함을 보인다. 그림을 완전히 자기화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노년에 이르러, ‘베짜는 여인들’과 ‘시녀들’에서는 벨라스께스의 ‘네 그림을 그려라’란 이상이 완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니, 그 완성을 넘어, 이전의 그림 세계를 뛰어넘어 이후의 시대에 가장 영향력있는 큰 획을 긋는 작품이 되었다. 특히 공간의 배치가 매우 주지적으로 이뤄진다.
이렇게 그의 초기 작품들은 고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전통적이나, 개인의 삶에 대한 주관과 의도가 병행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카톨릭 전통을 유지하면서 자체의 개혁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매너리즘적 경향에 한층 가까이 있다. 고전주의에 대한 매너리즘의 재창출은 단지 고전을 모방하는 데에서 머문 것이 아니라, 고전의 단순한 모방이 가져올 정신세계에 대한 공허감을 채우려는 주관적 가치의 삽입으로 평가되는 그 시대인들의 지적 부르짖음으로 평가된다. 매너리즘의 경향과 맞아떨어지는 벨라스께스의 그림 경향으로는 한 그림 내의 각각의 사물은 독립된, 그러나 연계된 각자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놀드 하우저는 매너리즘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늘어놓고 있는데, “한 부분에는 공간절약의 원칙이, 다른 한 부분에는 공간낭비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공간통일성의 해체는, 화면의 인물들을 재는 척도나 주제상의 의미가 논리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상호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가장 잘 드러난다.
본래의 대상에서는 부차적인 의미밖에 갖지 못하는 모티브가 때로는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가 하면, 반대로 주된 모티브로 생각되는 것이 공간적으로 평가절하가 되어 한쪽으로 밀려나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엑스트라인지는 아직도 완전히 정해지지 않았다고 작가가 말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매너리즘적 잣대를 가지고 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좀 더 설명을 부가하면, 바로꼬가 표현주의적 기법이라면, 매너리즘은 현대의 인상주의적 기법으로 대입해 볼 수 있다.
이는 바로꼬의 기법이 매우 추상적이며, 격정적이라는 점이 특징이지만, 매너리즘은 아직까지 주지적이고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범위 내에서의 초현실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Yo pinte la nubecilla verdosa porque me parecio advertir que las tintas carmesies suscitan a su alrededor un velo verdoso. El algo que ocurre en nuestros ojos.
나.- 주지적? 초현실성?
벨라스께스.- 나도 그런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네. 아마 그건 자네들이 쓰는 말일 뿐 일걸세. 나의 그림은 지금 존재한다고 볼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미래에 존재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러나 내가 원하는 가장 절정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지. 결정적인 순간은 내가 만들 수는 없네, 그래서 마냥 기다리는 거야. 난 마르가리따 공주님이 주인공이었으면 좋겠네. 그림의 정 중앙에 모시는 것이지.
벨라스께스는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 화가에게 펠리뻬 왕의 행적은 그리 맘에 드는 것이 못되었다. 근친혼에다가 방탕한 왕의 생활을 지켜보면서 국운의 쇠락을 더욱 연상시켜 실망의 도가 더해 갔던 것이다. 따라서 발따사르 까를로스 왕자가 죽었을 때나 왕실의 다른 불행이 겹쳐질 때에도 그것은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이곤 했었다.
이런 와중에 어쩐지 마르가리따 공주는 총명하고 세련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이성적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른 왕자들과는 달리 하인들을 이치에 맞게 부릴 줄도 알았고, 그들을 감싸주는 법도 타고났다. 그야말로 왕실의 법통을 이을 만한 유일한 희망이었다.
돈 후안이란 이름을 들을 만큼 방탕한 생활을 했던 펠리뻬4세에게 하늘이 보내준 희망과도 같은 존재였다. 아니 스페인의 운명은 그녀의 손에 달려있다는 생각이 화가의 마음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 공유 링크 만들기
- X
- 이메일
- 기타 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