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이야기] 벨라스께스, 그림 속으로 들어가다! (Velázquez, o el caballete fantástico)(IV-4)
- 공유 링크 만들기
- X
- 이메일
- 기타 앱
벨라스께스, 그림 속으로 들어가다!(IV-4)
나.- 이 그림은 뭔가?
벨레스께스.- (중앙의 어린 아이를 가리키며.) 마르가리따 공주님과 여러 궁녀들일세. 제목은 ‘왕가’(Retrato de familia)이지.
나.- 아, 이게 바로 자네가 1년 이상 끌어오고 있는 그 그림이구먼.
벨라스께스.- 그렇다네, 난 이 그림에 내 모든 혼을 불어넣으려고 했지만, 그만 벽에 부딪히고 말았네. (힘없이 자리로 돌아가며.) 거의 막바지에 왕이 자신의 모습을 마르가리따 공주 대신 그 자리에 넣어달라는 게 아니겠는가. 난 그럴 순 없었지. 이건 희망의 그림이거든. 만일 왕과 왕비가 들어온다면 그건 내가 원하는 그림이 될 수 없지.
나.- 난, 잘 이해하기 힘들군. 왕의 명이면 그 신하로서 복종해야 되는 게 아닌가? 그리고 왕이 공주와 함께 있다면, 당연 왕의 자리가 정 중앙에 가장 크게 그려져야 되는 게 아닐까? 더구나 왕가의 그림이라면 더욱 그렇지.
벨라스께스.- (약간 화를 내서, 격앙된 목소리로.) 모르는 소리. 이건 미래의 그림이야. 그 속에 과거가 중심에 위치한다면 말도 안돼. 미래의 그림은 미래를 준비하는 그림이며, 미래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지. 왕은 과거일 뿐이고, 그의 미래를 그린다면, 그것은 아마도...
벨라스께스는 ‘왕가’란 그림에 온 정열을 쏟아 부었다. 그는 온 생을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이 그림을 대했고, 스페인의 운명을 그려 넣겠다는 의도에서 더욱 숭고한 뜻을 품고 있었다. 단순한 현실을 미화하는 그런 의미보다는 스페인의 모든 것을 상징해 넣어보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는데, 왕이 이 그림에 참견하기 전까지는 그림이 그런대로 잘 되어가고 있었으나, 어느 날 화실을 들른 왕이 관심을 표명하면서 제안한 지시가 있은 후, 벨라스께스는 홍역 같은 긴 시름의 터널에 와있었던 것이다.
Vos creéis que hay que pintar las cosas. Yo pinto el ver.
이 작품을 보면 인물과 사물의 배치가 아주 주지적으로 의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왕부처의 차원과 공주 및 주변 시녀들의 차원, 그리고 작가의 차원이 독립되어 있으면서 같은 화면에 들어있음으로써 공간은 입체화되는데, 이는 대상에 대한 묘사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하려는 작가의 기발한 기법적 창조로 풀이된다. 즉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을 동시에 그려 넣음으로써 실제의 공간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히 보인다. 따라서 그의 그림이 이상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의 눈이 지나치게 평면적인 것에 익숙해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는 독립된 것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면서 전체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게 그림에게 공기를 주는 일이며,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일이다. 한편, 가장 최근에 발표된 논문에서는 그림의 좌로부터 벨라스께스, 도냐 마리아 아구스띠나 사르미엔또, 마르가리따공주, 도냐 이사벨 데 벨라스꼬,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호세 니에또 벨라스께스 등의 머리 중앙부분을 연결하면 북쪽 하늘에 있는 Corona borealis 왕관 별의 모양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물론 이 다섯 개의 별 중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마르가리따 별이며, 이는 공주의 이름과 동일하다. 인물과 사물 배치에 있어 벨라스께스는 당시 발전했던 천문학과 기하학, 그리고 극적 방법 등을 최대한 사용하면서 다양한 상징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있는 사물을 그리는 것과 내가 보는 대상을 그린다는 것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내가 보는 것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세계일 수도 있지만, 나만 볼 수 있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만 본다는 것은 나의 정서적 주관의 세계이며, 사물에 대한 나의 표현이다. 사물의 배치와 빛의 사용, 그리고 차원의 통합, 인물 묘사의 세밀성 차이 등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나- 거울이 있지 않는가?
벨라스께스.- 거울?
나.- 공주님의 공간이 빛과 미래의 공간이라면, 그리고 그 안에 왕을 넣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라면 바로 거울에 넣는 거야. 공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왕은 대상이 되는 공간의 전면에 계시며, 어쩌면 전지한 모습으로 존재함을 설명드리면 쾌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게 아닌가? 그것도 불안하면 제목을 바꾸면 어떤가? ‘시녀들’(Las meninas)로...
벨라스께스.- 시녀들? (사이) 음. (힘주어) ESPEJO...!
벨라스께스와 이야기를 나눈 지 한 시간이 지났는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빠르게 나더니 점점 가까와진다.
늘어지는 오후의 공간을 씩씩한 공명이 깨더니 발자국 소리가 멈춘다.
이윽고 작은 알다보나소와 함께 살그머니 문이 열린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그건 빛 속에 묻혀버린다.
문이 열리며 들어온 것은 사람보다는 강렬한 빛이다.
열린 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어둡고 숨막히던 공간이 멀리 끝없이 열려지고, 그 눈부신 길로 가슴을 압박하던 무거운 짐이 기화되어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의 눈은 문 쪽을 떠나 빛이 머무는 곳으로 간다.
갑자기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던 그림이 전체의 윤곽을 선명히 드러내 보여진다.
빛이 생명을 갖다 준 것이나 한 듯, 인물들이 살아나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빛을 받은 마르가리까 공주의 금발이 더욱 찬란한 색으로 변한다.
창에서 그리고 그녀의 뒤에서 쏟아진 강렬한 빛이 그녀를 신비스롭게 감싼다.
궁녀들 사이의 대화가 시작되고, 앞쪽의 개가 잠으로 꾸벅거리 때, 한 아이가 그 위를 작은 발로 밟는다.
그리고 좀 전까지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벨라스께스는 어느새 붓을 든 채 저 만치에 서서 날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손에 들려진 붓끝에는 아직 물감이 배어있다.
어느 새 그림 속 거울에는 하나인지 두 개의 형상인지 모르지만 내가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아니 나 같기도 하지만 내가 아닐 수도 있었다.
“나를 대상으로 한다? 나를 포기한다? 글쓰기를 그만둔다? 그래, 그리고?”
끊임없는 나에 대한 질문은 자기반영적 공명으로 연속되어 심연 깊숙이 메아리쳐진다.
“마치 혼수상태에 빠진 것 같으면서도, 몸을 가끔 움직이는군요. 조만간 의식이 찾아올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깨어나면 몸조리 잘 부탁드립니다.”
닫혀진 창문사이를 뚫고 들어온 듯, 실같은 빛이 아직도 누워있는 페르난도의 얼굴을 드러나게 하더니, 그 사이로 보이는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비친다. 오후 네 시 25분, 방을 나오며 언뜻 본 그의 오래된 책상에는 하얀 종이가 놓여있었고, 'Velázquez, o el caballete fantástico'란 글귀가 쓰여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 위에는 뚜껑이 열려진 굵은 만년필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 공유 링크 만들기
- X
- 이메일
- 기타 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