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귀향(세르반테스를 만난 조선인) / 40.소식(Noticias)
- 공유 링크 만들기
- X
- 이메일
- 기타 앱
두 사람이 읽은, 또 다른 글에서는 동양에서 온 사람들을 통해, 석희 자신과 관련되었던 사람들의 소식을 기록하고 있었다.
나가사키를 방문한 후, 마카오와 마닐라를 통해 최근에 이곳 꼬리아 델 리오에 닿은 스페인 신부를 통해, 쓰네나가의 사망소식을 전해들었다. 1622년, 그는 사망했다고 한다.
여기에 나와 나오끼를 두고 떠난 후, 원래 왔던 길을 역으로 해서 귀국길에 올랐다고 한다. 아바나에서 산 후안 데 울로아를 지나 베라끄루스와 뿌에블라, 그리고 멕시코시티에서 잠시 머문 후, 태평양을 건너기 위해, 아까뿔꼬에 도착, 거기서 배를 탔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배는 직접 일본을 향하지 않았다. 우리가 일본 센다이를 출발할 때 탔던, 산 후안 바우띠스따 호는 이미 스페인 사람들에 팔려 아까뿔꼬와 마닐라 노선에 투입된 상태였다.
결국, 루이스 신부와 쓰네나가 일행은 1616년 여름 세비야를 떠난 후, 1618년 6월 20일에야 마닐라에 도착했고, 1620년 9월 22일, 쓰네나가와 몇 명의 사무라이들 만이 나가사키 항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때 루이스 신부는 함께 도착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루이스 신부는, 처음 동양 선교를 위해 마닐라에 온 이후 2년 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먼저 한자와 일본어를 배운 것은 물론, 필리핀과 마카오 등 주변 지역에 대해서도 소상히 연구했다.
따라서, 다시 그곳 주변에 머물게 된 상황에서, 윤훈을 두고 나와 여기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어쨌든 참으로 길고도 힘든 항해를 했으니, 7년간의 여행으로 지친 쓰네나가는 급속도로 쇠약해졌으며, 일본 내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더욱 심해져 활동할 입지도 매우 약해졌다고 한다.
스페인 여행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그는 결국 50을 갓 넘긴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미야기 현의 한 절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그는 책임감이 강했고, 용맹했고 솔직했다. 미지의 바다인 태평양을 과감히 건넜다. 수많은 위험 속에서 유럽의 이곳 저곳을 이동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사무라이였다. 루이스 신부가 동행은 했지만, 그는 정말로 대단한 모험가였고, 신세계를 개척한 사람이다.
만일 일본이 쇄국 정책을 펴지만 안했다면, 그의 유럽 방문은 두고두고 더욱 높이 칭송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다. 늦게나마 고인의 명복을 빈다.
1623년 7월 24일, 조선인 宋錫喜 Bartolomé Rodríguez Correa
![]() |
| 엔푸구지(Enfuku-ji)에 있는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무덤 |
![]() |
| 쓰네나가 집안에서 보관해온 묵주 |
이윽고, 루이스 신부에 대한 소식을 담은 글도 있었다.
루이스 신부가 1624년 8월에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함께 여행을 했던 쓰네나가가 사망한 지, 2년 만의 사건이다.
그는 마사무네가 필리핀으로 보낸 배에 쓰네나가 일행과 타지 않았고, 이후 1622년에야 나가사키 항에 도착했으나, 거기서 붙잡혀 죽을 때까지 2년여를 감옥에서 보냈다고 한다.
계산해보면, 필리핀에 도착한 1618년부터 거의 4년 동안, 그리고 쓰네나가와 필리핀에서 헤어진 후, 2년 동안 그는 뭔가 많은 일을 시도했을 것이다. 물론, 그 어떤 일이든, 훈이도 신부님과 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일본은 기독교인들에 대해 더욱 강력한 금지 조치를 취했으며, 이제 아예 나라의 문을 닫아버렸다고 한다. 말하자면, 조선이 그랬던 것처럼, 외부 세계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했던 것이다.
특히, 루이스 신부의 일본 내 활동이 워낙 두드러졌기 때문에, 이미 루이스 신부는 요주의 인물로 분류된 상태였고, 그가 화형에 처해지는 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던 것이다.
난 많은 죽음을 봤다. 태평양을 넘으면서, 스페인에 도착하면서, 그리고 유럽 대륙을 이동하면서, 동행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고, 나와 여기에 함께 있었던 아오끼도, 일본으로 돌아간 쓰네나가도 세상을 떠났고, 이제 루이스 신부도 세상을 떠났다.
대신 나는 여기서 결혼도 하고, 아들과 딸도 낳았다. 나의 뿌리가 나의 고려, 이 꼬리아 델 리오에 점점 자라고 있다. 내가 돌아가야 할 조국은 더욱 더 멀어지고 있다.
앞으로 내가 갈 길은 어떻게 되는가?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가? 훈이는 고향 해남에 갈 수 있었을까? 오늘도 나는 훈이가 이곳을 떠나며 건네준 복주머니를 만지작거린다.
1625년 5월 5일, 조선인 宋錫喜 Bartolomé Rodríguez Correa
![]() |
| 기독교인 처형장면 |
꼬리아 델 리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도, 일본에서 전해지는 소식도 석희에게 절망적인 것이었다. 일본은 쇄국정책으로 들어가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가혹해졌다. 자신과 함께 긴 여행을 했던 사람들도 하나하나 세상을 떴다. 아직 나이는 많은 편은 아니지만, 다시 돌아갈 동력이 약해지고 있음을, 그럼으로써 생기는 개인적 고뇌를 나타내주고 있었다.
한편, 안또니오가 펼쳐준 문서에는 비센떼 권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오늘은 아주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1626년 6월 20일, 프란시스꼬 빠체꼬 신부, 후안 바우띠스따 신부, 그리고 나와 형제의 정을 나눴던 비센떼 권, 즉 권성빈 형님이 나가사키에서 화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선교의 임무를 갖고 조선에 들어가려 했으나, 실현되지 못 하고, 대신 조선 기독교 대표로 나보다 먼저 유럽 땅을 밟았던 성빈 형은 스페인 북부를 거쳐 마드리드에서 나의 소식을 접했고, 나에게 쓴 편지를 인편으로 보내왔었다.
편지를 쓴 후, 마드리드에서 리스본으로 이동, 배를 탔고, 아프리카 남단을 지나 긴 항해 끝에 1619년 마카오에 도착, 1620년에 일본을 돌아갔다고 한다.
1625년 12월 22일 다른 기독교 신자들과 함께 체포된 후, 6개월 만에 희생된 것이다.
성빈 형님의 순교지인 나가사키 근처 마을은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선교사들도 많았는데, 기독교 세례를 받은 우리들이 신봐라라는 마을을 만들었던 곳이다.
지상에 천주의 세상을 만들자는 뜻으로 우리끼리 부른 이름인데, 외국인 신부들과 일본 사람들은 이 마을을 시마바라라고 따라 부르곤 했다.
이 마을에 대한 강력한 탄압이 있었고, 서양의 선교사들과 함께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조선 출신이었다고 전한다. 어른들도 있었고, 아이들도 꽤 많았다고 한다. 오직 신을 믿고 신을 바라보자는 그 땅에서, 신을 향해 온몸을 바친 것이다.
만일 나도 쓰네나가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면, 루이스 신부와 함께 화형에 처해졌거나, 성빈 형의 처지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슬프다.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유럽을 향했던 성빈 형이 일본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과, 목숨은 부지하고 있지만, 이렇게 먼 땅에서 형이 죽은 소식을 접하는 나. 나는 비록 살았지만, 산목숨이 아닌 것이다.
1627년 8월 15일, 조선인 宋錫喜 Bartolomé Rodríguez Correa
- 공유 링크 만들기
- X
- 이메일
- 기타 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