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귀향(세르반테스를 만난 조선인) / 41.비센떼 권(Vicente Kaun)(Vicente Ca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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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앞에서 와는 다른 서명이 들어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편지인 것 같습니다.”
안또니오는 둥글게 말아서, 통에 보관되어 있는 서류를 펴며, 종국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송석희가 쓴 일기나 쪽지와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그렇군요. 이건 분명 다른 이름입니다.”
수신은 송석희, 바르똘로메라고 써있고, 서명하는 곳에는 한글로 조선인, 그리고 권성빈이라는 한자, 그리고 그 옆에 스페인어로 비센떼가 쓰여 있었다.
종국은 또 다른 흥분을 느꼈다. 그동안 자신이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비센떼 권이라는 사람에 대해 읽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 장군의 아들로 일본에 끌려와 기독교를 전파하다 순교한 사람이다. 교황청에서 복자로 지정하고, 그 옆에 출신지를 꼬레아라고 적시했줬다. 그런 인물이 송석희에게 편지를 썼다는 것과 그것이 스페인 땅에 남아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종국은 떨리는 마음으로 긴 편지를 읽어나갔다.
그리운 석희, 바르똘로메 형제에게.
우리가 일본에서 헤어진 후, 나는 프란시스꼬 빠체꼬 신부와 함께 북경에 가서 조선에 들어갈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네.
우여곡절 끝에 조선과의 국경에 닿았지. 나는 천주의 복음을 알리겠다는 사명보다도, 조국의 땅을 밟는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게 설레었네.
내딛는 한 발 한 발이 소중했고, 눈물의 발자국이었지. 그렇게 한양까지 갈 수 만 있다면, 그리고 한양의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마치 황홀한 꿈을 꾸듯 걸었네.
그러나 국경의 상황이 여의치 않았지. 외국인이 낀 우리 일행은 즉시 조선의 국경수비대에 발각되었다네. 서양인이라면 모두 기독교도라는 인식 때문에 무조건 체포를 했던 것이지.
한편, 국경수비대의 조직은 너무나 허술했기에, 탈출 또한 어렵지 않았지. 우리는 수비대를 벗어나, 다시 입국을 시도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쓰던 중, 마카오에 와있던 니콜라스 트리골트라는 신부가 유럽에 사절단을 구성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네.
트리골트 신부는 1606년 포르투갈을 출발, 인도와 중국, 특히 마카오와 난징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이었지.
유럽 사절단 소식을 접한 빠체꼬 신부는 이 번 기회에 내가 조선의 대표로서 유럽에 가, 조선을 알리고,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조선 선교에 필요한 지원을 받아오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였다네.
트리골트 신부, 즉 중국 이름으로는 김니각 신부도 로마와 유럽, 특히 자신의 고향으로 가서, 지인들로부터 동양 선교를 위한 각종 지원을 받아오겠다는 생각이었네.
우리가 알고 있지만, 몇 년 전에 돌아가신 마테오 리치 신부의 탁월한 활동으로 중국에서는 선교활동이 활발해졌고, 일본에서도 제한적으로나마 선교활동이 있었으나, 조선 만은 완전한 쇄국정책으로, 기독교의 진출을 철저히 막아내고 있었던 차에, 조선 기독교 대표로 임명된 내가 사절단에 동행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네.
나는 당장 고향 땅을 밟고 싶었지만, 보다 더 큰 일을 위해, 개인적인 꿈은 다음으로 미뤘네.
석희가 태평양을 넘어, 스페인과 로마로 간 다음, 최종 목적을 조선으로 했듯이, 나 역시 니콜라스 신부와 함께 갔다가 돌아온 후, 뭔가 체계적으로 조선에 들어가는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네.
우리 일행은 1613년 마카오를 출발, 인도를 지나서 페르시아만을 통과하고, 이집트를 거쳐, 1614년 10월 11일에 로마에 도착했네. 아마 석희 일행과는 반대방향으로 유럽에 도착했을 것이네.
로마의 교황청으로부터 7천여 권의 성경책을 선사받은 후, 다시 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지나, 니콜라스의 고향인 브뤼셀, 정확히 말하면 안트베르펜에 도착했다네.
우리는 1616년 11월 20일부터 1617년 2월 사이에 안트베르펜에 머물게 되었네.
거기서 신부는 가족은 물론, 지인들을 상대로 모금을 하였고, 특히 예수회 전속 화가인 피터 폴 루벤스라는 사람을 만났다네.
유럽에서는 많이 알려진 화가이자 외교관이라고 하였네. 로마에까지 가서 활동도 하고, 스페인 왕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라고 소개받았네.
신부와 화가는 나이도 같았지만, 이미 친분이 있었던 사이였지. 화가는 예수회와의 계약에 따라, 성 프란시스꼬 하비에르가 이룬 동방 선교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중이라고 했네.
마침 그는 선교지의 여러 민족, 즉 아메리카, 인도, 아프리카 사람들을 그림에 넣고 있던 차에, 우리 일행을 만나서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지.
니콜라스 신부는 선교를 하면서 번역에 대한 관심 뿐 아니라, 복식에 대해서도 특별한 흥미를 가지셨네. 선교를 하면서도 중국옷을 입고 다녔으며, 유럽을 가면서도 그 옷들을 챙겨 가셨다네.
화가는 그런 니콜라스 신부의 옷에 큰 관심을 가졌고, 그를 모델로 여러 그림을 그렸네. 중국옷은 중국에 대한 선교를 의미한 것이니, 내가 입고 간 조선옷은 조선에 대한 선교를 뜻 하는 것이 되었네.
말하자면, 프란시스꼬 하비에르의 선교활동은 서양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조선에까지 도착했다는 의미였네.
화가는 니콜라스 신부를 모델로 유화를 그렸고, 나를 대상으로는 소묘화를 그렸네. 그리고 자신이 주문받은 [성 프란시스꼬 하비에르의 기적]이란 그림에 나의 모습을 넣겠다고 했지. 원래 그 자리에는 다른 민족의 사람을 넣을 생각이었지만, 모델을 눈앞에서 직접 보게 되자, 그를 지우고 대신 나를 넣겠다고 말했네.
어린 나이에 일본에 정신없이 끌려가 제대로 된 조선의 옷이 없던 차에, 나는 북경을 통해 조선의 국경에 가서, 외투인 철릭과 속옷인 창옷, 그리고 말총으로 만든 방건과 갓 등을 구할 수 있었기에 몇 벌의 조선옷을 지닐 수 있었네.
난 조선의 기독교 대표라는 자격으로, 중국에서도, 그리고 유럽에 와서도 조선옷을 입고 있었네.
아참, 그러고 보니 1613년 10월에 우리 일행이 로마에 잠시 머물고 있을 무렵, 안또니오 뗌뻬스따라는 화가가 바티칸의 교황 접견실 벽에 우리 일행을 그린 후, 별로도 니콜라스 신부와 나를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네.
그 역시, 중국과 조선이라는 생소한 나라에 대한 호기심 뿐 아니라, 우리가 입은 옷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였네. 그들의 옷 형태와는 사뭇 달랐기 때문에, 더욱 호기심을 가졌던 모양이네.
그러나 우리의 일정 상,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그림을 그릴 수는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부러 그의 개인 화실로 찾아갔었네.
그 이유는 혹시 거기에 석희의 흔적이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네. 분명 다른 동양인이 보였더라도, 화가는 같은 제안을 했을 것이란 생각을 했던 것이지.
안또니오 뿐 아니라, 그의 제자면서 프랑스에서 유학 온 클로드라는 젊은 화가에게도 물었으나, 그들은 조선인을 본적이 없다고 말을 했네. 따라서, 나는 석희가 아직 로마에 도착하지 못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네.
한편, 우리 일행은 안트베르펜의 주변 지역에서 모금활동과 책 번역, 출판 등 여러 작업을 마무리한 후, 서쪽 해안 길을 타고 프랑스의 보르도 지역을 지나 생장 피에 드 포에에 도착했네. 거기서 마드리드로 갔다가, 다시 리스본으로 가는 일정이었네.
그런데 생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순례를 위해 출발하는 것을 봤네. 그들은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라는 스페인 도시를 목적지로 두고 있었네. 거기에 야고보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네. 우리도 이왕 스페인에 가는 김에 산띠아고 순례길을 걷기로 결정했네.
우리 일행은 스페인 땅으로 들어가, 빰쁠로나, 로그로뇨, 부르고스, 레온을 지나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에 도착했네.
약 2달이 넘는 순례기간 동안 길고 험한 고생길이면서, 동시에 내가 나를 찾는 시간이었다네.
조선에서 잡혀 일본으로 오고, 다시 중국을 거쳐 유럽 땅을 지나온 내가, 스페인의 깊은 산 속을 거닐면서 수행한다는 것이, 천주께서 예비한 일이 아니라면,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나.
나는 순례길을 걸으면서, 무엇보다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어느새 신앙의 뿌리가 깊어지고 있음을 느꼈다네. 유럽의 각지에서 산띠아고의 대성당에 도착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감격은, 아마 말과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네.
각자의 감동은 감동으로 전파될 것이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을 것이라 확신했지. 사람은 고생을 피하지만, 그 고생과 정면 대응하면서, 다른 차원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라 생각하네. 한 단계 더 성숙해지는 것이겠지.
이 길에서 느끼는 그 무엇은, 사람들의 말과 말로 이어져, 세월이 가도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라 확신했네.
한편, 나는 여행과 순례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네. 길을 걷는 것은 그것이 어떤 형태든 모두 깨달음을 주지만, 순례를 행함에 있어 처음부터 갖게 되는 방향성과 경건함은 그 길을 걸어 가면서 내면 깊숙이 닿는 것 같았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천주의 힘을 느꼈다네. 나의 이 큰 감동은 언젠가는 우리 조선인들에게도 전해질 것이라 확신하게 되었네.
사실 우리 일행의 목적지는 다시 마카오로 가야했고, 거기서 나는 베이징으로 갔다가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이었기에, 산띠아고까지 갈 여유는 없었지만, 우리 모두는 이 순례길을 간 것이 참으로 잘 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에, 우리 일행은 순례의 감격을 뒤로하고 마드리드로 향했고, 마드리드의 수도원에 도착했는데, 여기서 뜻밖에 석희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네. 얼마나 반가운지….
마침 수도원의 사제로부터 석희가 일본에 가지 못하고, 잠시 세비야에 머물게 되었다는 소식도 접하게 되었네. 정말로 감격스럽네!
나는 단숨에 석희에게 달려가고 싶지만, 4월 중순에 리스본에서 배를 타고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를 거쳐, 다시 마카오까지 가는 배에 타야하기에, 일정이 너무 촉박하네. 여기서 예수회 선교사 20명을 추가로 모집하였기에, 우리 일행의 숫자도 많이 커졌네.
그래서, 석희를 보지 못하는 아쉬움에 이렇게 그간의 사정을 글로 써, 수도원에서 세비야로 내려가는 인편을 통해 보내게 되었네.
우리가 일본에서 헤어지면서 다짐했던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해보네. 부디 건강하고, 꼭 조국, 조선에서 만나기를 간절히 기도하네.
1618년 3월 20일, 마드리드에서 조선인 權星彬Vice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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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센떼 권은 프란시스꼬 빠체꼬와 함께 1626년 일본에서 희생되었으며, 1867년 복자품에 올랐다. |
글에 몰입하여 열심히 읽던 종국은 다 읽은 후에야 숨을 크게 쉬어 본다. 글을 읽는 동안,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면서 너무나 긴장했기 때문이다. 편지를 읽는 내내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권성빈도 송석희처럼 이름 앞에 조선인이라고 한글로 쓴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종국의 가슴은 더욱 뛰었다.
400년 전, 조선인들이 스페인 땅을 밟았고, 그중 한 사람은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와 만나 대화를 나눴으며, 꼬리아 델 리오에 뿌리를 내렸다는 것, 또 한 사람은 스페인에 들어와 산띠아고 순례길을 걸었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종국은 자신이 근무했던 마드리드를, 이들이 이미 수백 년 전에 거쳐갔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큰 전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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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조선인 신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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