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Q] 열정과 고통은 한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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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돈키호테가 미쳤다고? 좋아, 받아줄 게! 그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일테니까! 그런데, 그대는 정상인가? 무엇이,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어떻게 해야 광기인가? 나는 한적한 라 만차의 작은 마을에서 노년을 맞이하고 있었어. 죽음을 향해 시들어가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 그렇지만, 나는 이런 나를 내버려둘 수는 없었지. 마침 기사들의 이야기책에 빠져있었던 터라, 미치기는 쉬웠지! 기사들의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읽다 보니, 내 몸이 근질근질거리기 시작했어! 가슴이 뛰었지. 열정의 불이 당겨졌을까? 나는 그냥 집 안에만 있을 수 없었고, 준비도 없이 바로 집을 나왔지. 열정의 불은 활활 타오르고, 나는 미쳤고, 그에 따라 고통도 따라왔지. 그러나, 난 알아, 수난과 고통, 그리고 불행을 겪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의미임을……
‘스페인’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정열’과 ‘열정’! 언제 이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강렬한 ‘태양’과 ‘플라멩코’, 그리고 ‘투우’를 연상하면서 이내 이 말에 수긍하기도 한다.
‘열정’을 영어로 쓰면, ‘Passion‘이고, 스페인어로는 ‘Pasión‘. 그러나 사전을 찾으면 의외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수난’!
외국인인 우리에게 ‘Pasión‘이 수난이나 ‘고통’으로 쓰이는 경우는 아주 낯설지만, 예수의 수난을 담은 영화의 제목과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고통스럽게 오르는 모습이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담은 그림에는 ‘La pasión de Cristo‘(The passion of the Christ)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정리해보면, ‘Pasión‘에는 ‘열정’과 ‘고통’이라는 의미가 공히 들어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렇다, 열정은 즉 고통인 것이다. 열정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그 만큼 수고로움과 고통도 클 것이고, 혹시 열정이 적다면 고통도 적을 수 있겠다.
사람은 심장이 있고, 생명체로서 뭔가를 하기 때문에, 사람은 적든 많든 열정이 있고, 그래서 모두는 고통을 겪는다. 예수의 수난과 그 고통이 컸다면, 그의 열정도 그 만큼 컸을……
스페인을 ‘정열의 나라’로 칭할 때, ‘돈키호테’도 한 자리를 차지해야 할 것 같다. 라 만차의 작은 마을에 살던 한 노인이 삶의 무료함을 깨고 열정의 불을 당긴 후 이내 밖으로 나와 겪는 모험이 작품의 내용이다. 식어가던 가슴을 다시 뛰게 한 것은 기사이야기를 담은 책들이었다. 그는 책 구입에 재산의 3분의 1을 썼고, 일하기보다는 책 읽기에 깊이 빠졌다. 이렇게 타오른 불길은 그를 미친 기사로 만들었으니, 이제 알론소 끼하노(Alonso Quijano)가 아니라 돈키호테라는 기사로 변한다. 열정의 불과 함께 사랑하는 여인이 생기고, 가슴은 설렌다. 심장은 더욱 더 빠르게 뛴다.
한가하게 늙어가고, 그렇게 죽어가던 그에게 엄청난 생명력이 발현되고, 어떠한 모험에도 두려움이 없다. 그냥 돌진한다. 일부러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찾아가, 시비를 건다. 그에게 풍차는 거인이어야만 했다. 전투를 해야하니까!
기사가 된 그에게 두려운 존재는 없다. 오히려 상대가 크고, 힘이 세다면 더 좋다. 상대를 이겨야 하지만, 결투하다 패배해도, 큰 상처를 당해도 중요하지 않다. 살아있다는 느낌, 바로 그것이 중요했다.
돈키호테에게는 열정과 수난이라는 뜻이 아주 잘 반영되어 있다. 그가 열정의 불을 지필수록, 더욱 광기에 빠졌고, 그 광기로 인해 받는 육체적 고통은 크다. 그러나 이 모든 수난과 고통도 사랑하는 여인이 가슴에 있으니 참아낼 수 있다. 패배는 오히려 살아있음의 증거일 뿐이다.
열정과 함께 언급되어야 할 중요한 단어가 있다. 바로 그 앞에 ‘Com-‘이 붙어있는 ‘Compasión‘이다.
사전에서는 ‘동정’, ‘자비’ 등으로 풀이하고 있다. 한편, 동정이 불쌍한 상대에 대해, ‘안됐다’는 마음이거나, 자비가 종교적인 그런 뜻이라면, ‘공감’이라는 것이 더 적합한 해석으로 보인다.
이 두 개념에 대해서는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 )도 깊이 생각했던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년)이란 소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동정이라는 단어는 접두사 ‘콤’(Com-)과 원래 ‘고통’을 의미하는 어간 ‘파시오’(Passio)로 구성된다. 다른 언어 예컨대 체코어, 폴란드어, 독일어, 스웨덴어에서는 이 단어는 똑같은 뜻의 접두사와 ‘감정’(Sentiment)이라는 단어로 구성된 명사로 번역된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에서 동정이라는 단어는 타인의 고통을 차마 차가운 심장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고통스러워하는 이와 공감한다는 뜻이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이재룡 역, 민음사, 37쪽)
사실 공감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의 열정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 이해의 배경에는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열정을 갖고 있으며, 그 열정이 좀 더 세지면 광기가 된다. 즉 모든 사람은 광기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나의 생각과 행동, 즉 나의 열정과 나의 삶은 내가 볼 때는 정상이지만 타인이 볼 때는 광적인 것일 수 있다.
일상의 우리는 같은 이해관계 속에서는 서로 정상적인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만일 이해가 상충되는 일이 발생하면, 같은 대상이라도 그(그녀)는 “미쳤다”고 말하기도 한다. 상대도 마찬가지로 나를 그렇게 평가한다. 결국 심장이 뛰는 우리 모두는 정상이면서, 동시에 미쳐서 사는 것이다. ‘Compasión‘은 이런 서로에 대한 공감인 것이다.
“열정과 광기가 없는 인생은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라는 하신또 베나벤떼(Jacinto Benavente, 1866-1954, 스페인의 극작가, 1922년 노벨상)의 말은, 삶이란 열정과 광기로 살아간다는 의미일 것이며, 동시에 “열정을 나누는 자만이 나의 광기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공감이란 어떤 것인가를 잘 말해준다.
현재 고통(Pasión)이 큰가? 혹시, 열정(Pasión)이 커서 그런 것은 아닌가?
서로 반목하고 분열되어 있는가? 혹시, 공감(Compasión)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l 단테가 살았던 이태리는 과거 로마가 분리된 후 작은 소왕국으로 나뉘어진 바로 그 모습이었다. 과거의 영화를 꿈꿨지만, 서로 대결하는 가운데, 그 꿈은 전혀 이뤄질 일이 아니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 단테 역시 희생자였다. 결국, 그가 추구했던 것은 통일된 이태리였으니, 그 뜻을 담은 것이, ‘Convivio’다. ‘공존’으로 해석된다. 이 공존, 즉 ‘공생’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Compasión‘이다. 분열과 반목을 넘어 하나가 되기 위해서, 함께 살기 위해서는, 각자의 열정, 각자의 고통을 이해해주는 공감이 필요하다는 그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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