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시아, 배를 비우고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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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시아(Galicia), 배를 비우고 가라!
마드리드를 떠나 북부로 이어진 까스띠야 이 레온(Castilla y Leon)에서 서북부 ‘갈리시아’(Galicia)로 접어들면 금색의 평지는 녹색의 산지가 되고, 강렬한 인상을 주던 진노란 해바라기 밭은 옥수수와 감자밭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산지가 많아 농지의 규모가 줄었으니 농장보다는 밭이란 표현이 적당하리라. 맑은 하늘보다는 구름 낀 하늘을 자주 만나게 되고 덩달아 기온도 내려가서 그 변화를 실감할 수 있으며, 가는 길 곳곳에서 긴 다리와 터널을 지나야 하는 것도 이 지역의 지형적인 특징이다.
(갈리시아의 옥수수밭)
갈리시아에 닿으면 이국의 풍경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한국의 어느 지방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스페인 땅을 바싹 태우는 건조한 공기가 없으며, 나무도 많고 물도 많다. 특히 북부로 올라갈수록 산이 많고 한국의 옥수수 밭이나 가옥에 딸린 채소밭 같은 것을 이곳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스페인이나 유럽에서의 낯선 외국 생활에 지쳐 있다면, 고향의 느낌을 그대로 전해 주는 갈리시아에 가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갈리시아 쪽으로 오면서 이층집이 많아지며 그 덩치도 커진다. 아무래도 갈리시아는 습기가 많고 비와 눈이 잦은 곳이기 때문에 가옥의 형태도 거기에 맞춰진 듯싶다. 지금은 주차장으로 쓰고 있는 1층 공간은 옛날에는 대개 주거 공간으로 쓰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었던 곳이다. 밖에서 할 수 없는 농사일의 부수적인 것들을 여기서 하며, 수확한 농작물을 처리하여 보관하는 공간이기도 하였다. 농기구를 세워 놓기도 하였으며, 눈이 쏟아질 경우를 대비한 곳이기도 하였다. 스페인 중부에서 볼 수 있는 돌로 된 벽이나 남부에서 접하는 하얀 벽은 찾아보기 어렵고, 나무로 벽을 만든 집들이 많다. 밖에서 들어오는 열을 막기 위해 석회를 이용하여 벽을 처리한 남부 지방은 그래서 흰색의 벽이 인상적이지만, 북서부의 갈리시아에는 산림이 많고, 그만큼 굵직한 나무를 이용하기가 용이했다는 점이 이유일 것이다.
(갈리이사의 시골집)
갈리시아로 접어들면서 보이는 각 가옥의 옆에 자리한 직육면체의 석조 구조물이 이색적이다. 긴 다리와 지붕 위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어 무언가 색다른 의문을 자아낸다. 무덤이 아닐까도 생각해 보지만 집집마다 하나씩 있으니 조상의 무덤이 하나뿐일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게다가 무덤으로 보기에는 집에 너무 바싹 붙어 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우물거리는 듯한 갈리시아 말로 ‘오레오’라고 대답해 준다.
(전형적인 갈리시아 지역의 주택)
이와 유사한 것들을 남부 까디스나 중서부 살라망까 등지에서 본 적이 있다. 홍콩 거리에서 사람들이 지나면서 가볍게 경배를 올리는 작은 사당 같기도 하고, 한국의 효녀나 열녀를 기리는 건축물들이 이와 비슷하리라고 생각되지만, 갈리시아의 오레오는 성자나 사람과는 관계가 없다. 그 속에 촛불도 발견되지 않는 단순한 곡식 창고일 뿐이다.
쥐나 다른 동물들이 곡식을 먹지 못하도록 바닥 네 귀퉁이에 하나씩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돌로 직육면체를 만들었으며, 위는 지붕 형식으로 양쪽으로 경사가 졌다. 그리고 맨 위에 십자가가 있다. 곡식 창고라고는 해도 한 가정의 모든 곡식이 여기에 보관되지는 않는다. 여기에 들어 있는 곡식은 일반적으로 씨앗에 해당된다. 이듬해에 쓸 씨앗을 건조하면서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이런 장치를 만든 것이다. 무덤으로 착각하게 만든 씨앗 창고의 십자가는 양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다음해의 풍년을 기린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또 오레오의 크기에 따라 그 가정의 농사 규모를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규모가 큰 오레오)
오레오와 함께 갈리시아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인 구조물로 ‘끄루세이로’라는 것이 있다. 끄루세이로에도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데, 한국의 장승과 같은 역할을 했던 듯싶다. 각 마을을 지키고 길을 알리는 이정표이며 신앙심을 상징하는 등 여러 기능이 끄루세이로의 몫이다. 높이와 모양은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3미터 정도의 둥근 돌기둥 위에 50센티미터 안팎의 십자가를 올려놓고 있다.
구조물에 십자가가 필히 놓인 것을 보면서, 스페인 사람들의 삶에 신앙이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를 짐작하게 된다. 마을이 있음을 알리고 하느님께 축복을 빎과 동시에 마을의 재앙을 막아 달라는 기원이 들어 있는 끄루세이로를 통해 인간 풍습의 보편성을 느끼게 된다.
끄루세이로 저만치 땅속에 파묻힌 듯한 집들도 보인다. 나무가 많지 않은 산에는 겉으로는 빈약하기 짝이 없을 만큼 돌만 있는 곳도 있지만, 돌과 돌 사이는 아늑하여 주거 공간으로 쓰기에 알맞다. 이를 보데가라고 해서 술 창고나 가정에서 이따금 술을 마시는 공간으로 사용한다. 또 이곳에서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도 있다. 갈리시아에서 행해졌던 혈거의 흔적을 이러한 보데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갈리시아 산골의 작은 마을을 가다 보면, 한국의 오솔길과 텃밭들이 그대로 옮겨져 있음을 느낀다. 스페인에 사는 한국인들의 향수를 달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요양지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화려하지 않으며 바닷가 작은 마을마다 깊게 주름이 팬 노인들의 모습이 정겹다. 키도 작을뿐더러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를 그대로 빼닮았다. 갈리시아의 인종은 켈트족들로 구성되며, 이들의 풍습이나 의상, 악기 등은 스코틀랜드나 북부 켈트족이 사는 곳과 비슷하다. 이곳의 가이따(Gaita)라는 악기는 백파이프에 해당되며, 비림바오(Birimbao)는 주즈하프로 볼 수 있고, 탬버린에 해당되는 빤데레따(Pandereta)도 켈트족의 전통 악기이다.
갈리시아의 특별한 먹을거리로는 ‘앙길라’ 또는 ‘앙굴라’라고 하는 것이 있다. 우리의 장어에 해당되며, 큰 장어라기보다는 그 새끼들로 실처럼 가늘어서 마치 마른국수를 먹는 기분인데, 이곳에서도 장어 요리는 스태미너 음식으로 여겨져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다.
‘깔도 가예고’는 갈리시아의 전통 수프이며, 우리의 입맛에 딱 들어맞는다. 돼지에서 나오는 여러 부위와 콩을 함께 끓여 만든다.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거북한 느낌을 줄 수도 있으나, 걸쭉한 국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맛보도록 권하고 싶다. 특히 추운 겨울날의 따끈한 깔도 가예고 국물은 최고의 맛을 연출한다.
(Birimbao)
‘뿔뽀 아 라 가예가’(Pulpo a la gallega)도 갈리시아의 명물 음식이다. 갈리시아 전 지역, 특히 바닷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 조리가 간단하고 먹기도 편하다. 통째로 삶아 큰 접시에 나오는 문어를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해 잘라 먹으면 된다. 소스도 거의 필요 없고 소금과 약간의 후춧가루만 있으면 된다. 마드리드를 비롯하여 다른 지역에는 문어를 잘게 썰어서 양파 등 간편한 추가 재료를 넣고 올리브기름에 튀겨 먹는 음식이 있는데, 이 ‘뿔삐또스 프리또스’(Pulpitos fritos)라고 하는 음식은 까페떼리아나 바에서 맥주를 마실 때 곁들이는 안주로 적당하다.
(갈리시아식 문어요리, Pulpo a la gallega)
이 밖에 피망을 튀겨 소금을 뿌린 ‘삐미엔또 데 빠드론’(Pimiento de padron)도 단순하지만 고추를 즐겨 먹는 우리의 입맛에 잘 맞으므로, 여행하다가 향수병이 날 때 한 번씩 먹어 보자.
(Pimiento de padron)
갈리시아의 말, ‘가예고’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말이 전해져 산띠아고 길을 따라서 포르투갈까지 이어진 것인데, 음악성이 강해 음유시 ‘깐띠꼬’(Cantico)를 낳기도 하였다. 즉 까스떼야노보다는 프랑스어나 포르투갈어에 가깝다.
독재자 프랑꼬는 스스로 갈리시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달성하기 위해 가예고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물론 그것은 에우스께라나 까딸란을 금지한 데 따른 정책적 일관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1492년 스페인의 통일에 까스띠야의 까스떼야노가 중요한 역할을 했듯이, 자신이 사용했던 가예고보다는 더욱 중앙집권적인 의미가 담긴 까스떼야노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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