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 지중해의 역사를 고이 간직한 도시, 무르시다(Murci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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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손도 닿지 않았을 것처럼 보이는 순수한 무르시아에도 스페인의 다른 지방이 겪었던 역사적 자취가 동일하게 남아 있다. 풍부한 농수산물을 노리고 진출한 페니키아인(Fenicios)들과 그리스인(Griegos)들에 의해 일찍이 상업화가 시작되었으며, 그들을 통해 농사도 활발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카르타고인들이 스페인 땅에 처음 닿은 곳이 이곳 무르시아였으며, 그들로 인해 동일한 이름을 얻은 까르따헤나는 주요 항구 역할을 하였다.
현대사에서도 무르시아는 기억할 만한 장소가 된다. 1936년에 시작되어 1939년에 마무리된 스페인 시민전쟁의 막바지까지 공화주의자 세력이 남아서 저항했던 곳이 무르시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지역이 지리적으로 반도의 중심에서 떨어져 있기도 했지만, 1939년 3월 29일에 무르시아, 31일에야 까르따헤나가 프랑꼬군에게 점령되고 4월 1일에 종전 선언이 이루어졌다. 이런 사실이 약점으로 작용하여 전쟁이 끝난 후에는 오히려 독재자 프랑꼬로부터 별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지역이 되고 만다. 권력이란 순하고 고분고분한 세력보다는 반란 세력을 싫어하지만, 저항 세력에 가장 약한 면을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삭 뻬랄(Isaac Peral)은 무르시아 출신의 군인으로 스페인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마드리드의 몽끌로아(Moncloa) 공군 본부 근처에 있는 거리의 이름이 이삭 뻬랄이기 때문에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그는 까르따헤나 시 출신으로, 1851년에 군인 가정에서 태어나 정규 코스를 밟은 후 장교가 되었다. 후에 쿠바와 필리핀, 그리고 19세기 말 스페인 왕실의 실권을 두고 싸운 ‘까를리스따 전쟁’(Guerra Carlista)에 참전했다. 나중에 그는 군대 안팎의 모함과 시기 때문에 베를린에 가서 1895년에 사망했다. 시골 무르시아인으로서는 제법 활동 무대가 넓었던 것 같다.
무르시아의 축제는 그들의 역사를 잘 보여 준다. 스페인의 패권을 놓고 기존의 카르타고인들과 로마인들이 서로 접전을 벌인 역사 및 후에 아랍인과 국토를 회복하려던 기독교인들이 싸웠던 일이 오늘에 와서는 축제로 변하였다. 다른 지역처럼 이곳의 축제들은 기독교 신앙에 토속적인 요소가 강하게 혼합되어 있다. 특히 기독교 이전 그리스ㆍ로마의 문화유산과 이후의 기독교와 토속적 문화가 독특한 축제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농사와 관련하여 ‘반도 데 라 우에르따 축제’(Bando de la Huerta)가 성주간인 세마나 산따 날 즈음해서 열리며, 8월에 첫 수확이 된 포도들을 모아 밟으면서 나온 첫 포도즙 모스또(Mosto)를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행사가 포도의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치러진다. 넓은 원형의 통에 채워 둔 포도를 밟으며 사람들은 노래와 이야기로 흥겨운 시간을 보낸다.
바닷가 마을에서는 ‘산 뻬드로 델 삐나따르’라는 축제가 열린다. 사람들이 가득 탄 여러 척의 배에 성모상을 싣고 ‘라 뿐띠까’(La Puntica)라는 지역까지 배를 타고 간다. 이 라 뿐띠까에서 ‘마르 메노르’(Mar Menor, 소해)까지 성모상을 옮기는 행사가 열리는데, 말하자면 일종의 풍어제라 할 수 있겠다.
스페인의 축제에는 이렇게 농사와 관련된 것들이 많으며 성모상을 옮기는 행렬이 주요 행사로 등장한다. 성모 마리아는 가톨릭에서 중시되는 인물이고 특히 어머니의 이미지와 풍요, 대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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