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강의] 나의 적이 나를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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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fRDuG8u5os 교착상태, 심연, 고뇌, 무의미, 허무, 절망의 순간, 깨달음의 순간, 햄릿, 파우스트, 돈키호테, 칼 융의 심리학, 2차원, 3차원, 4차원, 구원, 괴테,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인생은 꿈, 에고, 그림자, 타자, 자아, 악마, 천사, 메피스토펠레스, 산초, 근대문학, 서구문학, 돈키호테강의, 천사, 사탄, 선, 악, 동행, 하나는 둘이다, 둘은 하나다, 구원, 깨달음, 각성

[문예] 루벤스 앞에 선 '조선사람', 그 진실은?(IV-4)(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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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 앞에 선 '조선사람', 그 진실은?(IV-4)(반전) 사실,  루벤스의 조선남자는 [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 구상했던 프란시스꼬 까르레띠와 함께 로마에 갔을 안또니오 꼬레아도 아니고, 위의 글에서 상상해봤던 일본의 하세쿠라가  이끌던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조선인도 아니다. 그는 마카오를 떠나 유럽을 방문했던 벨기에 출신 예수회 신부, 니콜라스 트리골트( Nicolas Trigault, 1577-1628) 신부와 함께 했던 조선인임을 밝힌다.                        루벤스가 그린 니콜라스 트리골트(Nicolas Trigault, 1617)                                                               니콜라스 트리골트(1617) 루벤스와 니콜라스는 1577년 같은 해에 태어났고, 모두 벨기에가 출발점(루벤스는 지금의 독일지역인 Siegen에서 태어났지만, 이내 퀠른 지역으로 이주한 후, 다시 벨기에의 Ambers에서 생활, 니콜라스도 지금은 프랑스 령이지만, 과거에는 스페인이 지배했던 벨기에의 땅, Douai지역 출신)이었으니, 두 사람의 공통점이며, 루벤스는 당시 예수회 신부였고, 아시아, 특히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활발하게 했던 지역의 니콜라스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피터 폴 루벤스(1577-1640) 당연히, 루벤스는 니콜라스가 중국의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그리게 되고, 그와 연동되어 조선남자도 그렸을 것으로 상상된다. 다시 말해, 중국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니콜라스가 과학 및 가톨릭관련 서적들을 중국으로 가져가기 위해 유럽을 재방문했을 때, 특히 네덜란드의 고향에 잠시 도착했을 때, 루벤스를 만나게 되고, 그 기회에 루벤스는 중국 옷을 입고 있는 신부를 그림과 함께, 그를 동행했을 조선남자를 그리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인문학강의] 돈키호테가 본 두 그림 속 그리스와 로마의 차이 / Antigua 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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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동영상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0-guPhqB5co

[문예] 루벤스 앞에 선 '조선사람', 그 진실은?(IV-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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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 앞에 선 '조선사람', 그 진실은?(IV-3) 하세쿠라일행의 유럽방문과 루벤스의 그림에 나온 조선사람의 모습을 기본으로 이제 우리는 여러 가지 즐거운 소설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그림 속의 주인공에 대한 상상일 수 있는데, 의상을 봤을 때는 조선에서 입던 옷을 먼 로마 땅까지 가져올 수 있었다는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의복을 보면, 겉의 옷은 ‘철릭’, 또는 ‘천익’이라고 하여 무관공복이며, 임진왜란 당시 평상 외출복으로 설명되며, 안의 옷은 창옷이라고 불린다. 상투도 보이지만, 그 위에 쓴 방건인 말총은 조선시대 양반계층이 평상시 쓰던 일종의 관모라고 한다.)                                     펠리뻬 3세(Felipe III) 물론, 그가 조선에서 간 게 아니고, 일본을 통해 갔다고 생각해보면, 그는 조선에서 갔을 양반 중 하나였을 가능성과 유럽방문단의 주목적 중의 하나가 일본 내 가톨릭신자를 보호하기 위해 로마의 지원을 이끌어내려는 것임을 감안하고, 하세쿠라(당시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계급이 주로 가톨릭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를 비롯한 일행들이 대부분 가톨릭신자였을 것을 추측해봤을 때, 그도 이미 가톨릭신자로서 나름대로 그리 나쁜 대접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고, 일본인과 조선인 간의 통역, 또는 적어도 조선인의 대표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게 예상되며, 이 복장은 세례 등 중요한 행사를 위해  정복으로 가져갔을 가능성도 짐작해 볼 수 있겠다.  가톨릭 세례인으로서 스페인의 왕을 만나고, 로마에서 교황을 만난다는 가정 하에서 일본을 출발했다라면, 그가 분명 처음부터 자신이 애지중지 보관해왔던 조선의 정복을 준비해 갔을 것이란 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우리의 상상은 더 나가, 이태리 상인과 함께 안또니오 꼬레아가 로마에 먼저 가 살고 있었고, 그 뒤로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로마를 찾아왔다면, 우선 1615년 10월부터 1년이상 많은 조선인들이 로마라는 공간에 함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수

[문예] 루벤스 앞에 선 '조선사람', 그 진실은?(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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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 앞에 선 '조선사람', 그 진실은?(IV-2) 이태리의 상인을 따라 당시 안또니오 꼬레아가 로마에 도착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거의 개인적인 규모였다면, 루벤스를 만나는 과정에 대해서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 하더라도, 하세쿠라가 이끈 일본 사무라이 일행은 일단 규모가 크고, 로마에 도착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로마에 대대적으로 알려진 상황에서, 교황 바울5세를 알현하는 등 고위층과의 접촉이 이뤄졌으며, 로마에서 상당 기간 머물렀던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 화가로서, 그리고 외교관으로서 벨기에는 물론, 스페인, 이태리 등 유럽을 활발히 움직였던 루벤스와의 상면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클로드 데루아가 그린 사절단의 일본측 대표 하세쿠라 (1615년, 로마)                                   루벤스의 작품에는 나오지 않지만, 하세쿠라의 초상은 클로드 데루아(Claude Deruet: 1588–1660)에 의해 그려졌을 정도로, 대규모로 찾아온 이국인들의 방문은 당시 큰 반향이 있었던 일이었다. 클로드 데루아가 그린 방문단 단장 하세쿠라의 경우는 그야말로 전신 초상화라는 점을 비교하면, 루벤스가 그린 조선사람은 정식 초상화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인데, 성공한 안또니오 꼬레아를 대상으로 루벤스가 그렸을 것이라면, 적어도 유화로 된 정식 초상화가 되었어야 할 것이었다. 루벤스의 [성 프란시스꼬의 기적]에도 동양인이 나오는데, 루벤스에게는 세계 포교에 나섰던 프란시스꼬 하비에르(Francisco Javier: 스페인 나바라 출신, 로욜라와 함께 파리에서 신학공부 후 예수회 창설 주도, 세계 포교에 주력, 중국의 산촌(Shangchuan, Sanchon)에서 1552년 9월 1일 사망한다.)의 행적을 그림으로 남기면서, 아프리카 (모잠비크 포교), 인도 (인디아) 및 중국이나 일본인을 포교의 상징으로 작품에

[인문학강의] 지금, '대화'하는가, '대화'하는가? / Diálogo, o Conversació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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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 동영상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9y8wliea4Dg

[문예] 루벤스 앞에 선 '조선사람', 그 진실은?(I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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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 앞에 선 '조선사람', 그 진실은?(IV-1)                                                         루벤스의 [조선옷을 입고 있는 남자](A man in korean costume, 1617)(Getty미술관,미국)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작품에 나오는 조선인(《한복 입은 남자, A Man in Korean Costume》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왔던 이 그림은 미국 로스 엔젤레스의 폴 게티 미술관으로 옮겨지면서 《조선 남자, Korean Man》란 이름이 붙여진다.)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데, 그림 속 주인공에 대한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인이며, 그는 다른 조선인과 함께 일본에서 당시 아프리카의 노예를 구입해서 여러 지역으로 판매하던, 어쩌면 상인으로서는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이태리인 프란체스꼬 까를레띠라(Francesco Carletti: 1573-1636, 『나의 세계일주기』라는 책에 안또니오 꼬레아(Antonio Corea)가 등장한다.)라는 상인에게 인계되었다. 이 이태리인은 그중 똑똑하고 외국어를 쉽게 습득한 한 명을 이태리로 데리고 가는데, 그가 바로 안또니오 꼬레아이고, 그의 이태리 입국시기와 당시 벨기에, 스페인, 로마를 오가면서 활발히 활동한 화가이면서 외교관이었던 루벤스의 로마 방문 시기를 조합하여, 그림 속의 조선인을 안또니오 꼬레아라고 가정하고 있다.  Francesco Carletti의 이동경로 아울러, 이보다 좀 더 허구적인 요소를 부가하여, 안또니오 꼬레아가 부를 축적한 후, 루벤스와 같은 유명한 화가를 불렀고, 자신의 전신 초상화를 그리게 할 만큼 경제력이 대단했다는 해석도 달기도 한다. 이태리 남부 알비(Albi)지역의 '꼬레아'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의 원조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오세영의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차원에서

[논문과 기고문] 따마요 이 바우스의 新극작법(De la imitación a la creación en el teatro de Tamayo y Ba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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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마요 이 바우스의 新극작법 (De la imitación a la creación en el teatro de Tamayo y Baus) -모방에서 창작으로의 전환- I. 들어가는 말 스페인문학에서 19세기는 18세기와 더불어 중요성이 부여되지 않은 채 별로 다뤄지지 않 고 있는 게 사실이며, 특히 극에 있어서 이전의 황금세기나 이후의 20세기에 비해 언급 정 도가 상당히 낮은 게 현실이다. 18세기 프랑스 문학이나 19세기 독일 문학이 돋보임에 비해 동시대 스페인 문학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미약하며, 이 경향은 극 분야에 있어서도 마 찬가지다. 이 시대 스페인 극에서는 모라띤(Leandro Fernández de Moratín: 1760-1828) 및 호세 소리아(José Zorrilla: 1817-1893) 정도가 언급될 정도고, 그것도 창작보다는 외국작품 의 번역에 치중된 양상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본 연구의 대상으로 잡고 있는 따마요 이 바우스(Manuel Tamayo y Baus: 1829-1898)는 덜 알려진 작가지만 그의 작품 중 특히 『신극 Un drama nuevo』은 당시 극의 현실과 새로운 극에 대한 활로 모색의 측면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고 그의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따마요 이 바우스에 대한 연구는 전혀 되어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1) . 스페인 황금세기 연극 이후 18, 19세기의 연극에서는 주목받을 만한 극작가나 작품이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 2) 과 그로 인한 연구자들의 무관심이 첫째 원인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면, 바로코시대 로뻬 데 베가(Lope Félix de Vega Carpio: 1562-1635)의 연극론이 세간에 주목을 받고 많은 추종자 들이 그 작법을 따르게 되면서, 이후 극창작에 있어 한가지 지침으로 자리한 것에 비한다면, 따마요 이 바우스에게는 그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