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강의] '등장인물'인가, '작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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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MJfzBbFFSJ4 https://www.youtube.com/@Dali-Imagination-Space #Metafiction #메타픽션 #다층적 서술자 #작가의 죽음 #독자 반응 비평 #수용자 이론 #작가의 권위 해체 #현실과 허구의 교차 #원작과 위작의 긴장 #인물의 자기인식 #독자의 공동 창작 #위작 #플롯의 수정과 전환 #기사소설의 패러디 #서사 전통 성찰 #텍스트의 자의식 #자기 검열 #다성성 #경쟁하는 목소리 #해석의 개방성 #의미 갱신 #desengaño #engaño

[스페인와인] 평생을 동반하는 친구, 포도주(I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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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를 담아 보관하는 통을 용량에 따라 ‘바리까’(Barrica)라 부르기도 하고, ‘보따’(Bota)라 부르기도 한다. 바리까는 2,500리터들이 통을 말하며, 보따는 500리터들이 작은 통으로, 여기에는 최소한 6년 정도 된 포도주를 보관한다.  적포도주는 백포도로 만든 헤레스(Jérez, 셰리)와는 다르게 처리된다. 헤레스는 통에 원액을 다 채우지 않고, 80퍼센트 정도 넣어 공기가 들어 있을 공간을 마련해 둔다. 그 공간에 있는 공기와 원액 사이에 발효 물질을 넣으면, 포도주 표면에 얇은 막이 생기고 알맞은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면서 발효된다. 바리까(Barrica) 적포도주는 바리까에 100퍼센트 채워서 보관된다. 바리까나 보따의 재료로는 떡갈나무(Roble)를 쓰고 있는데, 포도주의 맛이라는 게 완전히 포도 원액의 맛이라기보다는 이렇게 떡갈나무와의 합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니만큼 떡갈나무를 잘 고르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셰리주 바리까(Barrica de Jérez) 바야돌리드의 포도주학교 교장이라는 베니그노 씨의 포도주 철학에 따르면, 포도주가 아기라면 바리까는 어머니라고 한다. 말하자면 아이인 포도주가 건강하게 출산되도록 하기 위해 일단은 어머니가 건강해야 하고, 적절한 온도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바리까의 역할이 포도주에 끼치는 영향은 지대하며, 포도주를 아이처럼 생각하는 지극한 정성이 들어 있는 표현이다.  스페인에서는 전통적으로 직접 키운 나무를 쓰다가, 수요가 많아지면서 미국산을 수입하여 쓰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바리까는 평면에서 80도 정도로 기울여 보관해야 한다. 오크나무(Roble)와 오크통 바리까의 포도주를 병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필요한 코르크는 스페인 말로 ‘꼬르초’라고 하는데, 포르투갈에서 많이 난다. 꼬르초는 포도주가 상품으로 포장된 후 그 질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물건으로, 밀도나 강도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 알코올을 유지시켜 주고 맛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스페인와인] 떼라스 가우다(Terras Gauda, 스페인 RIAS BAIX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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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반도의 서북부는 메세타의 내륙이나, 지중해의 보호를 받고 있는 동부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우선 대서양이라고 하는 큰 바다와 접해있고, 산들이 계속 이어진다. 언어도 포르투갈어와 비슷한 것은 오랜 옛날 아랍세력에 의해 지배되었던 스페인의 국토회복 과정에서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Santiago de Compostela)라는 지역이 성지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즉 전국 각지에서, 특히 스페인 북부와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부터 멀리 사람들이 찾아들었고, 그 길을 따라 도시가 형성되고, 언어가 들어오고, 문화가 들어왔으니, 서북쪽을 중심으로 그 남쪽, 즉 포르투갈까지 그 영향권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이 요즘 한국사람들에게도 유행하고 있는 <산띠아고의 길>(산티아고순례길)이다. 리아스 바이사스(Rías Baixas) 포도주 산지 따라서 이 지역은 포르투갈과 자유롭게 왕래가 많았던 곳이기도 하지만, 산지이고, 바다와 면해있었기 때문에, 이 지방 사람들은 늘 생활이 어려웠고, 중남미 개척 이민으로 많은 사람들이 대서양을 넘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쿠바의 피텔 까스뜨로(피델 카스트로)나, 쁠라시도 도밍고(플라시도 도밍고) 같은 사람들도 바로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이주한 경우가 되겠다. 이 지역의 또 다른 특징은 우리에게 익숙한 <리아스식 해안>이란 용어의 출발지라는 사실이다. 한반도의 남해안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해안의 굴곡이 심하다. 그러고 보면, <리아>(Ria)라는 단어는 이곳에서 ‘강’이란 뜻이 된다. 즉 바다와 접해있는 강이라고 보면 정확한 뜻이 되겠다. 비고(Vigo) 큰 도시로는 비고(Vigo)와 라 꼬루냐(La Coruna)가 있고, 행정의 중심도시로는 뽄떼베드라(Pontevedra)가 있으며, 관광의 중심지로는 역시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가 있다. 이곳에는 많은 해수욕장이 있지만, 물이 차갑고, 해안도 크지 않다. 물론 농토에는 옥수수, 고추 등 한국의 산지와 유사한 농사를 접하게 ...

[스페인와인] 스페인 포도주의 대표, 라 리오하 (La Rioja), 그리고 '포도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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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리오하’는 그런대로 한국에도 알려진 이름이다. 특히 포도주 애음가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보고 먹어 본 포도주가 라 리오하에서 나온 것들이다. 빠이스 바스꼬(País Vasco)에서 출발하여 로그로뇨(Logroño)와 사라고사(Zaragoza)를 거쳐 지중해로 접어드는 에브로(Ebro) 강을 끼고 있는 라 리오하, 나바라, 그리고 빠이스 바스꼬의 알라바 도는 포도주의 집산지이다. 라 리오하의 아로시청(Ayuntamiento de Haro) 라 리오하의 포도주 질은 스페인 최고는 아니더라도 상품화와 수출의 역사가 길고,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이 지역의 포도 농사는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적포도주를 비롯하여 백포도주, 로제 와인 등이 다양하게 생산된다.  와이너리 '무가'(Bodegas Muga) ‘아로’(Haro)에 가면 포도주 생산에 관련한 여러 시설들이 기다리고 있다. 아로에는 포도주 박물관이 있어 전통적으로 사용되는 포도용 농기구를 비롯해서, 수확한 포도를 가공하여 보관 및 최후에 상품화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실물과 모형을 통해 잘 설명해 준다. 또한 아로의 보데가 중에 ‘보데가스 무가’(Bodegas Muga)라는 포도주 공장에 간다면 포도주를 직접 즐길 수 있다.  포도주전투(Batalla del Vino) 옛 보데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보데가스 무가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친절하며, '하몬'(Jamón) 조각 한 접시에다 포도주를 시음할 수 있게 해 준다. 포도주로 유명한 도시답게 아로에서는 포도주를 서로에게 뿌리는 축제인 ‘라 바따야 델 비노’(La Batalla del Vino, 포도주 전쟁)가 열린다. '산 뻬드로'(San Pedro)의 날인, 6월 29일 아침에 전쟁은 시작된다. 이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온몸은 마치 전쟁에서 피 흘린 병사의 모습이 된다. 옷을 벗어 던지고 아무에게나 무차별적으로 포도주 포를 날리면서 다음해의 풍년을 기원...

[문예] 깐따브리아(Cantabria)의 보물, 산딴데르(Santa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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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선사시대를 알려 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알따미라 동굴(Cueva de Altamira) 벽화가 위치한 곳이 ‘깐따브리아 자치주’이다. 스페인 북부의 깐따브리아 이 지역은 스페인 최북단 중앙에 자리하는데, 산과 바다의 적절한 조화가 선사시대인들이 살기에 알맞은 조건이었을 것 같다. 나무가 많아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볼 수 있는 테라스가 집집마다 마련되어 있지만, 기온이 낮고 날씨 변화가 잦기 때문에 풍부한 돌을 사용해 집을 짓고 창문은 아주 작게 마감했다. 알타미라 동굴벽화           남부 지방에서는 햇빛을 피하기 위해 회랑이 만들어졌던 데 비해, 깐따브리아 지역에는 오히려 겨울철의 비와 눈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회랑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은 아스뚜리아스와 함께 반도에서 로마화가 가장 늦은 지역이었으며, 이후 비시고도와 아랍인들의 지배권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단지 지형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닌 듯싶다. 산악 지역 사람들의 소박함, 즉 깨끗한 자연의 물을 마시고 땅에서 자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자연 속에 살지만, 전투에 돌입해서는 이마에 띠를 두르고 돌진하는 용맹함 때문으로도 볼 수 있겠다. 알타미라 동굴벽화            깐따브리아는 산업화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아름다운 산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의 여름 휴양지로 각광 받고 있다. 18세기에 하나의 독립된 지역으로 인정받았으며 프랑꼬 총통의 통치 기간까지는 ‘까스띠야 라 비에하’(구 까스띠야)에 속해 있었고, 그래서 지형적으로 건조하고 해가 많은 까스띠야와는 본질적으로 어울리기 어려운 지방이다. 서쪽으로 아스뚜리아스에, 그리고 동쪽으로 빠이스 바스꼬에 면해 있는 깐따브리아 자치주의 대표적인 도시이자 주도는 ‘산딴데르’(Santander)이다. 산딴데르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의 하나로 손꼽힌다. 사실 현재의 깐따브리아란 이름은 1982년까지 산딴데르라고 불렸을 정도로 이 ...

[인문학강의] 책을 태워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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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동영상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erY4Up6P2g0

[연재소설] 귀향(세르반테스를 만난 조선인) / (마지막회)44.도착(Lleg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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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기자님, 드디어 알아냈습니다.” “뭐, 그럼 예상하신대로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었던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조선인 송석희, 바르똘로메 로드리게스 꼬레아! 제가 여러 물증과 자료를 준비해서 갈 테니, 귀국하는 즉시 만납시다.” 세비야 공항으로 가면서, 종국은 평소 잘 알고 지내는 김영남 기자에게 연락했다. 외무부 출입기자들 중에 친분이 생기고, 차라도 함께 마시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때, 가끔 종국은 자신이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연구해온 내용을 말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담아 듣지 않았으나, 김 기자는 남다른 관심을 표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다큐멘터리 제작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도 했었다. 종국의 전화를 받은 그의 목소리도 흥분되어 있었다. “김 기자님, 감사합니다. 짧은 기간 동안 참 많은 것을 알게 됐습니다. 특히, 하뽄이라는 집안에서 대대로 보관해온 자료들이야 말로 그동안 어떤 자료보다도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역사를 바꿀 내용이자, 400년을 기다려온 영혼들을 달래줄 수 있는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정말로 궁금합니다! 빨리 돌아오세요!” 훌리아와 안또니오, 그리고 종국이 탄 차는 이내 공항에 도착했다. 종국은 마드리드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수속을 마쳤다. 짐을 실으면서 복주머니는 짐가방에 넣지 않고, 왼쪽 가슴 안주머니에 넣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희 집안의 내력을 이제야 정확히 알게 된 것이 기쁩니다. 저희들 뿐 만 아니라, 하뽄이라는 성을 가진 많은 사람들의 정체성을 이 번 기회에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네, 저도 제가 어릴 적 보았던 그 편지와 물건들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스페인과 한국은 서로 연관성도 없고, 멀게만 느껴지는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스페인과 한국의 시골 마을의 서로 다른 집안에서 보관되어온 자료들이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서로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글자들이지만 영혼이 깃든 ...

[연재소설] 귀향(세르반테스를 만난 조선인) / 43.동상(Estat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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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동상이군요. 종국은 송석희가 고향을 생각하면서 늘 바라봤을 강을 직접 보고 싶었다. 셋은 안또니오의 집을 나와 강으로 향했고, 강 옆 공원에 다다랐을 때, 쓰네나가의 동상이 서있었다. 사무라이의 동상은 마을 앞을 흐르는 강을 한 눈에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송석희가 많은 시간 고향을 그리워했을 바로 그 자리일 것이라 종국은 생각했다.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동상 안또니오의 말에 의하면, 세비야의 고문서 보관소에서 마사무네의 편지가 발견된 것은 1862년이었고, 그것을 계기로, 1882년 당시 파리에 주재했던 일본 대사가 세비야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 후 오랫동안 묻혀있던 이 이야기는 1992년 세비야 세계엑스포를 맞아 나루히토 왕세자가 직접 방문하여 쓰네나가의 동상 제막식을 했다고 한다. 나루히토 왕세자(현 일본천황)의 기념식수 이후, 양국 간 교류는 활발해지고, 그 과정에서 많은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1620년 이후, 세례명부에 하뽄이란 성이 등장하기 시작해서, 주변 엑스뜨레마두라 지역까지 넓혀졌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물론, 세비야 시에 있는 한자로 된 자료와 일본 사절단에 대한 기록물은 물론, 마드리드 왕실의 고문서를 통해서도 일본 사절단의 방문이 확인되었다. 세비야에서는 이들과 관련된 행사 및 관련 비용의 지출 내역까지 발견되었고, 왕실에서도 일행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찾아냈다. 하뽄이라는 스페인 성이 일본 국명을 부르는 스페인어 표현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하뽄 성씨의 사람들은, 뜻밖에 자신들의 기원을 알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동상 앞에 선 종국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머리에는 여러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조선과 일본, 멕시코, 스페인, 이태리, 네덜란드, 포르투갈, 그리고 중국과 마카오. 그레고리오 데 세스뻬데스, 루이스 소뗄로, 하세쿠라 쓰네나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 로뻬 데 베가, 피터 폴 루벤스…. 무엇보다도 송석희, 권성빈, 안도현 등과 유럽 땅을 밟은 ...

[연재소설] 귀향(세르반테를 만난 조선인) / 42.복주머니(Reliqu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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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이것은 우리 집안에 내려오는 물건입니다.” 안또니오의 손에 뭔가가 들려있었다. 그것을 본 종국은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복주머니였다. 분명 여러 색으로 꾸며진 복주머니는 작았고, 오랫동안 매만졌는지 손때가 깊이 배어있었다. “이 물건은 집안의 여러 문건들과 함께 수백 년 동안 보관되어 전해오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가지 상황을 파악해보니, 이것은 조선의 것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바르똘로메 로드리게스 꼬레아, 아니 송석희 님이 남긴 물건 말입니다.” 상기된 얼굴의 안또니오는 송석희의 이름을 아주 또박또박 발음하고 있었다. “네,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꼬레아라는 성은 없고, 하뽄이라는 성으로 내려오는 것에는 어떤 연유가 일까요?”   일기와 자료를 함께 읽은 종국이 이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가인 훌리아에게 물었다. “사실, 꼬레아라는 성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묻혀버린 것이죠. 즉, 스페인에는 전통적으로 꼬레아라는 성이 있습니다. 그 숫자는 많지 않지만 말입니다. 이태리에도 그 성이 있는데, 아마도 스페인어로 꼬레아가 ‘가죽띠’, 또는 ‘혁대’라는 뜻이기 때문에, 스페인이나 이태리에서 꼬레아는 원래가 가죽과 관련된 업종에 종사한 집안을 말하는 성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통 서양에서의 성은 그 직업에서 따온 게 많은 것을 보면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주로 일이라는 게, 가내에서 계승되는 경우가 많았으니, 성으로 전환된 것이겠죠. 따라서 여기서의 꼬레아는 ‘R’이 두 개로 된, Correa로 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최근 제가 책을 쓰면서 발견한 바르똘로메 로드리게스 꼬레아라는 분은 자신의 이름에 성을 달면서, 맨 뒤에 Corea를 넣고 싶었고, 그래서 넣었을 것입니다. 그의 사촌이라고 말하고 있는 바르똘로메 로드리게스 하뽄이 일본임을 나타내주기 위해 국가 이름을 넣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린 바와 같이 스페인에는 Correa라는 성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에, 그것을 따르는 것도 ...

[인문학강의] '멘토'를 뛰어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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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동영상 유튜브 주소:  https://youtu.be/wcJajgBEgr8

[연재소설] 귀향(세르반테스를 만난 조선인) / 41.비센떼 권(Vicente Kaun)(Vicente Ca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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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앞에서 와는 다른 서명이 들어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편지인 것 같습니다.” 안또니오는 둥글게 말아서, 통에 보관되어 있는 서류를 펴며, 종국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송석희가 쓴 일기나 쪽지와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그렇군요. 이건 분명 다른 이름입니다.” 수신은 송석희, 바르똘로메라고 써있고, 서명하는 곳에는 한글로 조선인, 그리고 권성빈이라는 한자, 그리고 그 옆에 스페인어로 비센떼가 쓰여 있었다. 종국은 또 다른 흥분을 느꼈다. 그동안 자신이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비센떼 권이라는 사람에 대해 읽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 장군의 아들로 일본에 끌려와 기독교를 전파하다 순교한 사람이다. 교황청에서 복자로 지정하고, 그 옆에 출신지를 꼬레아라고 적시했줬다. 그런 인물이 송석희에게 편지를 썼다는 것과 그것이 스페인 땅에 남아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종국은 떨리는 마음으로 긴 편지를 읽어나갔다. 그리운 석희, 바르똘로메 형제에게. 우리가 일본에서 헤어진 후, 나는 프란시스꼬 빠체꼬 신부와 함께 북경에 가서 조선에 들어갈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네. 우여곡절 끝에 조선과의 국경에 닿았지. 나는 천주의 복음을 알리겠다는 사명보다도, 조국의 땅을 밟는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게 설레었네. 내딛는 한 발 한 발이 소중했고, 눈물의 발자국이었지. 그렇게 한양까지 갈 수 만 있다면, 그리고 한양의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마치 황홀한 꿈을 꾸듯 걸었네. 그러나 국경의 상황이 여의치 않았지. 외국인이 낀 우리 일행은 즉시 조선의 국경수비대에 발각되었다네. 서양인이라면 모두 기독교도라는 인식 때문에 무조건 체포를 했던 것이지. 한편, 국경수비대의 조직은 너무나 허술했기에, 탈출 또한 어렵지 않았지. 우리는 수비대를 벗어나, 다시 입국을 시도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쓰던 중, 마카오에 와있던 니콜라스 트리골트라는 신부가 유럽에 사절단을 구성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네. 트리골트 신부는 1606년 포르투갈을 출발, 인도...